2020/08/20

밀가루 폭발



어머니가 창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원래 나는 창고를 정리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창고 정리를 거들게 되었다. 창고 구석에 버려야 할 것이 잔득 쌓여있었다. 나는 휴지나 나무조각 같은 것이나 밭둑에서 태우고 방에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창고 정리를 도울 형편이 안 되었다.

태울 것을 외발 수레에 싣고 창고를 나가려는데 창고 구석에 있는 종이 상자가 보였다. 하얀 가루가 들어있었다. 밀가루였다. 아버지가 화물을 운송하다가 밀가루 봉투를 파손해서 변상하고 담아왔다고 한다. 가져온 지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이물질도 섞여 있었고 쥐도 입을 댔는지 쥐똥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그냥 냅두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고 외발수레에 밀가루도 실었다.

태어나서 밀가루로 만든 요리를 태워본 적은 있어도 밀가루를 직접 불에 태워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밀가루도 불에 타겠거니 하고 가져온 것이다. 밭에 뿌리거나 근처 논에 뿌리면 거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제분 공장에서 가끔씩 폭발사고가 일어난다. 밀가루를 잘 뿌리면 그냥 노릇노릇하게 타는 것이 아니라 불이 잘 붙지 않을까? 밀가루를 한 줌 쥐고 불에 뿌렸다.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한 줌을 더 뿌렸다.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한 줌을 더 뿌렸다. 동심이 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전쯤이었나,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5일장에 가면 뻥튀기 장수 앞에 나를 세워두고 볼 일을 보고 오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뻥튀기 장수와 친해서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뻥튀기 장수가 뻥튀기 기계를 가열하면 내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오- 오-” 하면서 기계를 보다가 뻥- 하고 터지는 소리만 나면 그렇게 박수치고 웃고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빵튀기 기계를 가열하면 또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오- 오-” 하면서 터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기계를 못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30년 전이라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그랬다고 한다. 할머니가 장에서 볼 일 다 보고 올 때까지 나는 뻥튀기 장수 근처를 떠나지 않고 터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좋아했다고 한다.

30년 전 나는 뻥튀기 기계 앞에서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서른여섯에 하는 불장난이 이렇게 재미있으니 여섯 살짜리 눈에 뻥튀기 기계가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밭둑으로 불이 번지고 있었다. 원래 옮겨 붙을 게 아니었는데 작은 폭발이 계속되면서 마른 풀에 불이 옮겨 붙었다. 건너편은 논이고 내가 서 있는 곳은 길이라서 불 붙을 것이 없었다. 밭둑에 깔려 있던 마른 풀에 붙었지만 올해 새로 난 파릇파릇한 불이 빽빽하게 있어서 조금 번지다 말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한참 있어도 내가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가 밭둑에 나와서 불이 옮겨 붙는 광경을 본 것이다.

어머니는 화를 냈다. 도대체 불을 어떻게 놓아서 그런 것이냐, 엄마가 예전에 불 잘못 놓았다가 나무 태워먹어서 죽인 거 못 봤냐, 배수로 파이프 태워먹으려고 그러냐 등등. 나는 여름이고 산 풀도 많아서 불이 조금 번지다 말 거니까 괜찮다고 했다. 욕을 더 먹었다. 불이 더 번지지 않도록 밭둑에 있는 풀을 베기로 했다. 집에 뛰어 들어가서 장화 신고 낫을 들고 나오는데 그 동안 불이 꺼져버렸다. 내 말이 맞았다. 그래서 나는 남은 밀가루를 한 줌씩 또 던졌다. 또 동심이 살아났다.

밀가루를 다 태우고 나서 창고 정리하는 어머니한테 가서 말했다. 거보라고, 내 말이 맞지 않냐고, 나는 엄마처럼 어설프게 불 놓다가 나무나 태워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러면 밀가루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체 물질의 입자가 작아지면 표면적이 넓어져서 반응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미친 놈이라고 욕을 먹었다.

내 나이 서른여섯, 혼자 밭둑에서 불장난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느 여성하고 불장난을 했으면 어머니한테 욕을 덜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20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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