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9

대학원에 진학하는 마음가짐



가끔씩 대학원 입학 문의를 받는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좋을지 묻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한 학기만 다녀보고 도망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지원하세요.”

대학원 진학이 꽤 무거운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기회비용이 큰 사람에게는 무거운 선택이 될 것이다. 좋은 직장을 다니던 사람이 대학원에 들어가면 수입이 크게 줄어들 뿐만 아니라 경력 단절 때문에 재취업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대학원 진학이 무거운 선택이 될 필요는 없다. 한두 학기 다니다 도망가면 되기 때문이다.

여러 대안 중 나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른 선택보다 대학원 진학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대학원에 가고, 그렇지 않다는 것이 뒤늦게라도 드러난다면 매몰 비용이 커지기 전에 빨리 벗어나는 것이 옳다. 사람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다니지 않아도 될 대학원을 다니며 굳이 고통을 감내할 필요는 없다. 군대에서 도망치면 탈영병이 되지만 대학원에서 도망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원에는 추노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원 탈출이 전과처럼 인생 내내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다.

교수들의 입장에서는 대학원 진학이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에게 무거운 선택이 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대학원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교수 사정이고 학생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생산성 향상과 무관하게 정신 건강만 안 좋아진다. 학위 취득 여부도 장담하지 못하는 학생이 교수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노예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연한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할지도 의문이다. 어차피 연구의 성패는 지능에 달려 있다. 결연해 죽겠어봤자 머리가 나쁘면 소용없다. 그리고 마음은 쉽게 변한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마음이 변하게 마련이다. 교수가 결연한 마음가짐을 원할 것 같으면, 학생은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척만 하면 되지 정말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게 뻥인지 아닌지도 가려내지도 못한다.

‘배수진’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배수진을 치고 무슨 일을 해야지 무슨 일이든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배수진이 뭔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배수진을 친 군대는 대부분은 몰살당했다. 한신의 배수진이 유명한 것은 배수진을 쳤는데도 이겼기 때문이다. 한신의 배수진이 성공한 것은 미숙련 병사들로 배수진을 쳐서 아군이 못 도망가게 하는 동시에 적군을 유인하는 한신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지, 배수진에 마법 같은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배수진을 치는 것은 퇴로도 확보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군대다. 이길 전략으로 배수진을 치는 것과 막장 상황이라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히 다른데 사람들은 배수진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대학원 진학에도 적용된다. 다른 일을 충분히 잘 해왔거나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학원에 오는 것과, 취업도 안 되어서 소나기 피하러 원두막에 들어오듯 대학원에 들어오는 것은 다르다. 이는 대학원 와서 인생이 망한 것과 인생이 망해서 대학원에 온 것만큼이나 다르다. 취업 안 되는 김에 대학원에 온 사람이 잘 된 사례는 아직까지 보고된 바가 없다. 내가 알기로, 학문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괜찮은 대안이 있었는데도 굳이 대학원에 온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고 도망가도 되는 사람들이 공부 잘 해서 성공한 것이다. 성공할 사람들이니 대학원에서 도망칠 이유도 없었던 것인데, 사람들은 교수될 사람들이 대학원 다니는 동안 돈 못 번 것만 보고 배수진 같은 소리나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원에는 다른 곳에서도 잘 살 사람들이 들어와야 하고, 한두 학기 해보다가 잘 될 것 같으면 계속 다니고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도망치면 된다. 물론 대학원에서 이러저러한 자원을 학생에게 투자할 테니 나 또한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식의 최소한의 상도덕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뭔가 숭고하고 종교적인 감정, 결연한 의지, 비-생산적 열정 같은 것까지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나처럼 퇴로도 없고 연구 능력도 없는 사람이 대학원에 와서 곤란을 겪는 것은 딱한 일이기는 하겠으나, 퇴로가 있는 사람까지 어디서 이상한 이야기를 주워듣고 쓸데없는 심적 부담을 겪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대학원 입학 여부나 학위 취득 여부도 불확실한 마당에 대학원 입학지원서에 학위 취득 이후의 계획까지 쓰라는 것만큼이나 불필요하다.

(20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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