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4

소래포구를 다녀오다



지난 주 금요일에 소래포구를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소래포구 코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나는 협동과정 자료실 도서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도서정리 1차 작성이 월요일에 마무리되어서 정리작업 뒤풀이를 금요일 저녁에 하기로 했다. 금요일 아침에 동료 대학원생에게서 카카오톡이 왔다. “오늘 자료모임 저녁 6시 소래포구로 오시면 된다고 합니다!!” 나는 알았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 날 나는 기숙사에서 하던 일을 마저 하고 낮잠을 잠깐 잤다가 일어나서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소래포구로 출발했다. 저녁 6시쯤 소래포구에 거의 다다랐다. 가는 도중 길을 헤매서 15분쯤 늦게 되었다. 소래포구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소래포구에 있는 가게로 곧장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동료 대학원생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가게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답장이 왔다. 어? 주소지가 서울시 관악구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인천 소래포구 코앞까지 왔는데 가게는 관악구 낙성대동에 있었다. 횟집 이름이 <소래포구>였다.


아찔했다. 아침에 보았던 카카오톡을 다시 보았다. “오늘 자료모임 저녁 6시 소래포구로 오시면 된다고 합니다!!” 어디에도 인천이라는 말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인천에서 뒤풀이를 할 리가 없다. 학교에서 소래포구까지 승용차로 30-40분, 대중교통 수단으로 1시간 30분 이상 걸린다. 상황이 이러니 웬만한 악당이 아니고서는 소래포구에서 뒤풀이를 하자고 하지 않을 거다. 뒤풀이 장소를 잡은 선생님은 좋은 분이다. 내가 교수라고 해도 뒤풀이 장소를 그렇게 잡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왜 나는 여기 있나? 내가 여기에 왜 왔지? 아, 내가 미쳤구나.


반대편 차선에서 버스를 갈아타려고 일단 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도로 폭이 너무 넓고 건너편 정류장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온 곳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고 주택지도 없고 도로에는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허허벌판이었다. 일단은 길을 건너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에 갔다. 내가 타고 온 버스가 승하차 하지 않는 정류장이었다. 일단 다른 버스를 탔다. 버스가 시흥시청으로 갔다. 이런 허허벌판에 시청이 있었다니. 시흥시청역에서 전철을 타고 다시 낙성대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길 위에서 다시 두 시간이 지나갔다.


전철 안에 앉아 있으니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왜 그랬나. 어느 누구도 나를 속이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감기약 같은 것을 세게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 전날 잠을 덜 자기는 했지만, 사실 며칠 밤을 샌다고 해도 웬만해서는 그런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심신미약 상태도 아니었다. 누가 나에게 최면을 걸지도 않았다. 그러면 나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판단을 한 건가. 모든 정보가 정상적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나는 왜 그렇게 이상한 판단을 했나. <자금성>에서 뒤풀이를 한다고 했어도 나는 북경행 비행기를 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부 때 학교 근처에 <달나라>라는 분식집이 있었는데, <달나라>에서 뒤풀이를 한다고 해도 NASA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소래포구>를 횟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천 소래포구로 받아들였을까. 소래포구에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당시에 판단 능력 중 일부가 작동하지 않은 것 같다. 보이스 피싱 같은 거 당할 때 이렇게 판단 능력이 마비된 상태로 통장 비밀번호를 넘겨주는 건가 싶기도 했다.


너무 황당한 일이라 이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인가 싶기도 했다. ‘전능한 악마의 기만인가? 내가 매트릭스 안에 있나? 아, 이래서 메릴린치가 그런 보고서를 썼나.’ 2016년 9월 미국의 투자사 메릴린치는 우리가 매트릭스에서 살고 있을 확률이 20-50%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왜 그런 보고서를 썼을까. 2016년 초에 주가가 폭락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전산 오류도 아니고 해킹 당한 것도 아니고 횡령이나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닌데 눈 뜨고 투자 손실을 입으니, 너무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어서 그런 보고서를 쓰게 한 건 아니었을까.


내 후배 중에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 있다. 유부녀인 그 후배는 나를 보면 영감이 떠오른다면서 나를 “뮤즈”라고 부른다. 그 날 겪은 일은 그 후배에게 또 다른 영감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그걸 그대로 각본에 썼다가는 개연성을 밥 말아먹었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일은 라디오 사연으로 보내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분명히, 상품타려고 지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소래포구> 횟집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과 학생들은 내가 먹을 전어회를 남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제자 중에 저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은 없었죠?” 선생님은 답했다. “나중에 내가 너를 학생으로 만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한 일은 대학원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먼 미래의 대학원 사람들이 “옛날에 낙성대 <소래포구> 횟집으로 오라고 했더니 인천 소래포구로 간 사람이 있대. 그런데 그 사람은 박사학위도 못 받았대”라고 말할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어떻게든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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