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6

[형이상학] Gilson (1949), Ch 2 “Being and Substa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tienne Gilson (1949), Being and Some Philosophers (Toronto: The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pp. 41-73.
  E. 질송 지음, 「제2장. 존재와 실체」,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론의 쟁점과 그 전개과정』, 정은해 옮김 (서광사, 1992), 83-137쪽. ]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 구체적 존재

83-
플라톤은 자신의 존재론에 이데아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들을 우리가 알 수 없고, 또 그들이 우리가 사는 감각 세계와 관련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이 더 유복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있는 것, 즉 우시아(ousia)에 관심을 갖지만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는 판이하게 다름.
그에게 있어서 실재는 이 사람, 이 나무, 이 나무 조각 등 그가 보는 것과 만질 수 있는 것
실재는 그것이 다른 어떤 이름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에게서는 개별적이고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하나의 사물, 즉 그 자체로 존속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자체로 정의될 수 있는 판명한 존재론적 단위
예를 들면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피터나 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개별적인 이(this) 사람 같은 것이다.


우시아, 우연자, 술어의 구별
  
85-
우리가 주어진 어떤 사물 속에 현존하는 어떤 성격들을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실재라는 명칭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성격들이 있음.
그것은 예를 들면 감각적인 질(質)들
하나의 색깔은 언제나 색깔 있는 사물에 속하지만 그들 자신의 어떠한 존재도 가지지 않는다는 중요한 형이상학적인 결론이 따라 나온다. 
그들이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은 “속하는 것이고 “~안에 있는” 것일 뿐이다. 
이점이 바로 이것들이 “우연자들”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
  
이와는 다른 측면의 성격이 있다. 
“사람임”(manness)은 예를 들어 하양(색깔)과 같이 개별적인 존재에 우연히 속하거나, 이 존재 안에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
이 점의 증거는 하얗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능한 반면에 사람이지 않으면서 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임”은 어떤 주체들 안에 속해 있는 하나의 특성이 아니라 그러한 주체들의 탓으로 돌려질 수 있는 성격인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주어진 어떤 사람에 “관해서 말해”질 수 있는 무엇이며 이러한 특성을 “가능적 술어”(predicability)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실재적 존재들에 관해 아는 것은 그들이 “사람”이거나 “돌”이라는 추상적인 관념들도 아니고 한 사람의 색깔이나 돌의 크기 같은 단순한 우연자들도 아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있는 것은 본래적인 권리로 개별적이라는 점이 따라 나온다. 
개개의 현실적 주체는 우연자들을 지탱하는 것으로 “실체”(sub-stans)라는 명칭을 받을 가치가 있다.


제1현실(사물 자체)과 제2현실(사물의 행위)
  
87-
실재로 하여금 실재적 이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하나의 개별적 주체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아는 것인데, 이 무엇은 그 주체로 하여금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것. 
우리가 갖는 유일하면서도 분명한 지표인 감각경험에 있어서 어떤 실체가 그렇게 있다는 것은 실체가 수행하는 기능들이며, 실체가 원인 짓는 변화들. 
우리는 그들이 행하는 것에 의해 실체들을 감지한다. 그 자신의 여러 기능의 내적인 원리로서 파악된 어떤 실체를 “본성”(자연, nature)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렇게 행위하기 위해 개개의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지속적인 활력, 즉 하나의 현실이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구체적으로 실재적이고 전체적으로 역동적인 세계로서, 그 안의 존재는 더 이상 자체성이 아니고 활력과 효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의 말하는 이“현실”은 첫 번째, 사물 자체 또는 사물 자체인 바의 것(제 1현실, actus primus), 두 번째, 그 사물에 의해 행사된 어떤 개별적 행위(제 2현실, actus secundus)로 구분됨.
그가 기술하는바와 같은 실재는 활력의 현실적으로 실재적인 한 핵이기 때문에, 바로 그 핵은 어떤 개념에 의해 파악될 수가 없다. 
즉, 실체들은 그들의 가장 내적인 실재에 있어서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존의 정의 불가능성
  
89-
그는 있다는 것이 현실로(in act)있다는 것, 즉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의 현실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상이한 명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그의 독자들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정의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유비적 경우들을 비교함에 의해 그 두 용어의 의미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도록 이끈다.
 
“건축되고 있는 것이 건축될 수 있는 것에 대응되듯이, 깨어남은 잠에, 보는 것은 눈을 감았으되 시력을 갖고 있음에, 질료로부터 형성된 것은 질료에, 가공된 것은 가공되지 않은 것에 대응한다.”

이러한 예들은 그가 “현실성은 사물의 실존을 의미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플라톤의 선과 같이 존재 이상의 것이 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지만, 그것은 존재 안에 있는 것이거나, 바로 그 존재의 실재성이 되는 것으로, 그것은 정의되지 않음.
실재적인 사물들이 그런 것을 지니고 있으므로, 철학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


실존 물음의 주제화 여부
  
90-
현실인 어떤 한 존재에 관해서 그것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먼저 적어도 있다는 것이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러나 우리가 가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안 속의 어떤 것도 우리로 하여금 그가 존재라고 부른 것 속에 현실적 실존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도록 허용하지는 않음.
사실상 모든 것은, 그가 존재에 관해 말할 때 그가 결코 실존을 생각지 않은 것처럼 전개됨.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의 많은 의미들 가운데서 첫째의 것은, 존재가 있는 것을 의미하는 곳에서의 의미인 데, 거기서 존재는 실체를 지시한다”고 함.
다른 말로 해서 사물의 있음은 사물의 무엇(what)으로, 이것은 사물의 실존의 사실이 아니라, 사물인 바의 무엇이면서 하물로 하여금 하나의 실체가 되게끔 하는 그런 것
그것이 실존한다면, 우리는 물론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을 말해야만 할 것
그러나 오직 사물인 바의 것에 관해서 말할 뿐이지, 사물의 실존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님.
  
이것은 실존, 곧 존재의 단적인 전제 조건이 존재의 구조 내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 하는 이유가 됨. 
존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참된 이름은 실체이며 이것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존재인 바의 무엇과 동일하다.
  
일차적으로 있는 것, 있는 것의 실체, 사물인 바의 무엇, 간단히 말해서 어떤 사물의 “무엇임”이 바로 그것의 존재이다.


실체 내의 최고 실재: 형상

93-
실체 내에서 가장 실재적인 것은, 실체가 그것에 의해서 하나의 현실이게 되는 그 어떤 것임이 분명함.
그런데 구체적인 하나의 실체는 그의 질료 때문에 그것인 바의 무엇이 되는 게 아님.
실체 안에 현실적인 바의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질료가 아니라 형상임.
하나의 동물은 그의 유기적 특성, 그의 모든 우연자들, 그리고 그것이 수행하는 모든 기능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인 원리를 갖으며 그것이 바로 형상이다.
형상은 그것에 의해 하나의 실체가, 실체인 바의 무엇이게 되는 그런 현실이다.
존재 안에는 형상 이상인 바의 어떤 것도 없다.
이것은 어떤 한 존재의 형상이, 자신에 관한 어떠한 현실도 없는 그러한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플라톤에게 되돌아가고 있다는 혼란을 수반함.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하늘로부터 지상에서 끌어내려진 플라톤의 이데아들에 불과하다는 것이 종종 정당하게 논증함.
유일한 차이는 형상이 종 전체를 통하여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개별자의 참된 존재는 결코 종의 참된 존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뿐이다.


개별화의 원리인 질료와 개별성의 원리인 실존
  
95-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만이 실재한다고 보며, 이 사람에게서 실재적인 무엇은 어떤 사람에게서도 그 사람인 바의 무엇이라고 결론지음.
그는 개별자들이 자신들의 질료의 덕으로 개별자들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지극히 실재적인 것(형상)이 거의 완전히 실재의 결여를 드러내는 어떤 것(질료)를 통해서, 실재적인 것이 되는 교설 속에는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있다. 
개별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종들이 그래서 참된 존재와 참된 실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범한 일차적인 실수는 동사 “있다”를 단일한 의미로 사용한 것
실제로 이 동사는 두 가지 의미
의미(1): 이것이 하나의 사물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면, 개별자들만이 있고 형상들은 있지 않음.
의미(2): 이것이 하나의 사물의 무엇을 의미한다면 형상들만 있고, 개별자들은 있지 않음.
  
참된 사실은 본질들이 있고 개별자들이 실존한다는 것이며, 그 결과 마치 자신들의 본질을 통하여 그리고 그 본질 안에서 개개의 개별자가 참으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개의 본질은 어떤 개별자를 통하여 그리고 그것 안에서 실존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개별화(individuation)와 개별성(individuality)을 구분하고 있어야만 하며, 실존이 본질보다 적지 않은 필연성을 갖고서 어쩌면 본질보다 더 깊숙하게 현실적 존재의 구조에 끼어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함.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실존 없이, 실존자들(existents)로 구성된 셈.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 아베로에스
  
100-
종교는 세계를 만든 분인 최고의 유일신이 있다고 가르침.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세계가 창조될 때 동시에 발생된 최초의 것은 있다는 것.
아비첸나는 실존한다는 것이 존재들에게 발생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실존 자체는 하나의 “우연자”라고 가르치지만 아베로에스는 존재와 실체가 한가지라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그는 실체를 그의 현실적 실재와 동일하게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실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있다는 것이다.

 
아비첸나의 실존: 우연자
  
103-
일상 언어에서 있다는 것이 거기에 있다(sein is dasein)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사물은 그것이 우연히 거기에 있거나 있지 않다는 사실보다 우선하면서도 또한 그 자체로서는 이 사실과 구분되는 하나의 실재가 되며 이 실재를 우리는 본질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아베로에스에 따르면 이는 아비첸나가 범한 실수임.
왜냐하면 이로부터 어떤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그 존재는 무엇이다의 무엇과 구분이 되며, 그 본질은 그것이 실존이나 있다(esse)를 수용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존재라는 명칭을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에, 본질은, 오직 그것이 그의 실존을 이미 수용한 한에서만 존재라는 명칭을 받을 가치가 있음.
결과적으로 자신의 실존과 분리된 채로는 본질 자체는 단지 한갓된 가능자일 뿐이다.


실체도 우연자도 아닌 실존
  
106-
아비첸나가 말한 것처럼 실존이 우연자라면 실존은 다른 우연자들의 속성과 다른 것 같음.
예를 들어 양과 질은 환원 불가능하게 구별되는 두 개의 우연자의 범주들이다. 
그러나 실존은 그렇지 않다. 
있다는 것이 하나의 범주라면, 그것은 무차별적으로 모든 다른 범주들에게, 그것도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것이다. 
누구라도 어떤 실체나 우연자의 관념에 아무 것도 부가되도록 하지 않으면서 그런 실체나 우연자에 관해서 말해질 수 있는 그런 어떤 것을 하나의 우연자로 간주할 수가 없다. 
모든 다른 범주들에 공통된 하나의 범주라는 생각은 불합리하다. 
아비첸나는 “있다”라는 것이 존재의 관념에 어떤 것을 부가한다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지만 “존재”는 하나의 단어로서는 “있다”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아베로에스는 “어떤 한 존재의 실체는, 그것을 통해 그 존재가 하나이게 되는 것으로서 있음이고, 이것을 통해 그 존재는 하나의 존재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실체, 하나, 있다. 존재의 동등화가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완전하다.

 
가능적 존재와 현실적 실존의 관계

110-
현실화된 가능자들이 있으며, 이들의 존재가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히 한 가능자였을 때의 존재와 같을 수가 없다. 
이러한 제한된 형식하에서는 적어도 실존의 문제가 제거될 수 없다.
   
아비첸나에게 있어서 모든 실존하는 존재는 “그 자신으로부터는 가능적이고, 다른 것으로부터는 필연적인 것”이다. 
아비첸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필연적”이라고 간주한다면 그런 존재들 중의 한 경우를 고찰해 보자. 
그것이 있는데, 그리고 그것이 있는 것이 필연적인데, 우리는 무슨 의미로 여전히 그것이 “가능적”으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비첸나는 그러한 존재는 그 자체(본질)에 있어서 가능적으로 남아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본질을 그의 현실화보다 앞서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아직 실존하지 않으면서 어떠한 필연성도 갖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실상 하나의 순수한 가능자이지만, 만약 그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이때에 그것은 실존하며 또 그것이 필연적인 것으로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가능성의 흔적도 없게 된다. 
따라서 그것이 꼭 같은 시간에도 가능적이며, 가능적이지 않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의 실존과 분리된 채로는 본질 자체는 단지 한갓된 가능자일 뿐이다.
 
아베로에스는 “그 자체로부터 가능적인 것(본질)”의 실존을 설명하기 위해, “당신은 종교적 법칙에 의해서 이 세계에 귀속된 새로움이, 그 교설 내에서 이해된 바대로의 사물들의 새로움과 같은 본성을 가짐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모든 실존하는 존재는 필연적인 우연 사건들이지만, 여전히 그들은 우연히 발생한다는 점에서, 아비첸나의 세계는 우연 사건들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베로에스는 이러한 아비첸나의 우연자로서의 실존 개념이 가져오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적 창조 개념을 철학적으로 대체시킨 것이다.

 
아베로에스의 세계: 가지적 필연성의 견고한 연쇄
  
113-
아베로에스의 우주는 새로운 어떤 것도 결코 우연히 발생치 않는 우주임.
이러한 자기 동일적인 세계 내에는 실존을 위한 어떠한 준비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새로움에 전적으로 맞서는 증거로서, 세계는 영원히 있는 그대로 머문다. 발생과 소멸은 특이한 종류의 운동일 뿐이다. 
태어나서 짧은 삶을 사는 우리 자신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 보자면, 이런 존재들이 변화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들의 유일한 기능이 이들 자신의 종의 영속성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 
이 종 자체는 그들 덕분에 항상 있고 결코 변하지 않는다.
  
세계는 그것인 바의 무엇으로 항상 있어 왔다. 인간성도, 인간 지식도 항상 그것인 바의 무엇으로 있어 왔다. 
왜냐하면 가지적 형상들의 총체가, 살아있는 사유하는 지성에 의해, 우리를 위해서, 우리 안으로, 위로부터 방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 전체는 항상 인간의 종의 독특한 지력인 지성 안에서 현존함.
비록 당신이 죽을 때 그 지식을 가져갈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을 담는 어떤 개별적인 지력을 당신이 갖고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지식도 상실되지 않음.
간단히 말해 개별적인 인간들은 전적으로 가사적(mortal)이지만, 이들이 잠시동안 참여하는 모든 참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본래적 권리로 불가사적이다.
  
질송: “차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히 피안에 있다. 그래서 그 것은 그것이 차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실재적으로 피안에 있다.”
  
모든 현상들(모든 ‘새로움'을 포함한)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세계는 가지적 필연성의 견고한 연쇄이다. 
이러한 것이 왜 존재가 항상 있되(있음), 자신의 존재(그것인 바의 무엇)와 떨어져서는 파악될 수 없는가에 대한 궁극적 이유이다. 
사실상 이러한 것은, 파악 가능한 어떤 존재에게서 “있다”와 “그것인 바의 것이다”가 아주 꼭 같은 것이 되는 그런 하나의 심적인 세계의 완벽한 사례인 것이다. 
이것이 아베로에스의, 존재와 실체를 동일시한 형이상학의 구조이다.

  
본질과 실존의 구분: 신학적 필연성이 아닌 철학적 합리성
  
117-
13세기의 가장 유명한 아베로에스주의자 중의 한 명인, 브라반트의 시거의 경우, 그가 존재 자체가 대상이 되는 학에 직면했을 때, 물어진 최초의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피조물들에 있어서, 존재 (ens)나 있다(esse)는 피조물들의 본질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러한 본질에 부가된 어떤 것인가?”
  
기독교 신학자들은 피조물들이 그들 자체로부터 실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실존을 신에 힘입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관계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은, 피조물들이 그들 자체의 힘으로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실존을 신으로부터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피조물들의 존재가 하나의 부여 받은 존재라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들은 있는 유일한 그 자신을 통한(per se) 존재, 곧 그들의 창조주인 신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에서는 본래적 권리로 있는 어떠한 피조물도 없다. 
이렇게 피조물 들은 그들 자신의 실존을 그들 자체에 힘입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 내에서 실존과 본질 사이의 구분을 해야만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기독교 신학이 필연적으로 그것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교설로서 그러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이 참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상이한 존재 형이상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 임의대로 신을 그분의 피조물들로부터 구분하는 많은 다른 방식을 발견해냈던 점이 이를 증명한다.
  
  
브라반트의 시거의 속단: 본질·실존 구분의 신학적 기원설
  
120-
시거는,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신학적 필연성으로 인한, 실존과 본질의 구분이, 바로 본질과 실존간의 구분의 기원이며 정당화였다고 판단했다.

이 점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본질과 실존간의 구분에 대한 그 자신의 의견 -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사물은 그것의 본질에 부가된 성질의 덕분으로 있다고 말하며, 그 결과 그들에 의하면 '사물 (thing)’과 ‘존재(being)'가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있다'는 것은 본질에 부가된 어떤 것이 다.” - 에 대해, 시거가 “그의 논거는 원인론》의 이유, 즉 사물들은 그들의 존재를 그들의 제1원리로부터 갖는다는 것이다”고 언급한 부분에서 드러난다.
  
현실적인 것은 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자체 속에 그 자신의 실존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포함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추상적으로 그것을 하나의 실존하지 않는 사물로 파악할 수 있다.
(실존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은, 문제의 사물이 자신의 본질과 실존에 의해 그 자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어떤 피조물과 이의 창조주 사이에서 얻어지는 결과와 원인의 관계를 표현할 뿐.
  
시거는 토마스 형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처음인 분 아래에서 그 자신에 의해서 존속하는 모든 것은 복합적이다. 이러한 마지막 이유가 토마스 형제에게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토마스 형제에게 있어서는 그 마지막 이유가 중요한 것이 되지는 않았다. 신 아래에서 어떤 것도 단순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피조물들이 본질과 시론을 포함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후에, 토마스 형제가 자연스럽게 사물들 내에서의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단순성의 결여는 본질과 실존의 복합에 기인한다고 결론지었지만, 그는 이러한 복합을 그들의 단순성의 결여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그는 존재하는 피조물들 내의 구분을 현실과 잠세의 구분을 통해 설명해냈다. 
따라서 제1원인 아래의 모든 것이 복합적이라는 사실이, 토마스 형제에게 있어서 피조물 안에 본질과 실존의 구분을 정립해야 하는 주요 원인이 될 수는 없었다.

 
피조물의 현실성: 형상의 현실성

122-
창조된 존재들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그들은 그들의 원인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전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제1원리로부터 구분시키는 것은, 그들이 있다는 사실에는 있을 수가 없고, 그들 고유의 존재 방식, 즉 그들인 바의 무엇에만 놓여 있다. 처음인 분은 순수 현실이기 때문에 하나이며, 단순하다. 
반대로 그분 아래의 여타의 모든 것은 그분의 순수한 현실성의 단순한 분유이다. 
그런데 하나의 분유는 항상 일정한 정도를 갖는 분유이다. 
창조된 어떤 존재들이라도 그들의 원인의 현실성을 많이 혹은 적게 분유하는데, 이 점은 그들이 처음인 분의 단순성에 많이 혹은 적게 접근하는 것에 따라 상이한 본질들을 갖는다는 것의 이유가 된다.
 
그런데 어떤 피조물이 현실에 있어서 결여하는 것은, 그의 잠세에 의해 정확하게 측량된다. 
다시 말해, 그들로 하여금 피조물이 되게 만드는 것이 그들 자신의 현실의 본질을 지적해 주는 잠세의 양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 속에는 단순성의 결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피조물, 즉 순수하게 정신적인 하나의 실체를 보도록 하자. 
처음인 분같이 그것은 자기 존속적인 사유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처음인 분의 단순성을 결여할 것이다. 
처음인 분 아래의 인식하는 모든 실체들은 가지적 종을 통해서만 그들의 대상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거의 전체적 논거는 명백하게 실체 자체의 현실성이 존재 자체의 현실성의 전체라는 점을 수반한다. 
그러한 세계 내에서는 있다는 것이 곧 실체이다. 
어떤 주어진 존재의 전체적 실재는 바로 그것의 형상의 현실성에 의해 완벽하게 설명된다.
 

알베르투스 형제와 토마스 형제에 대한 시거의 비판
  
124-
시거의 관점에서 볼 때, 알베르투스는 신만이 제외될 때, 피조물들이 능동 인과의 계열 속에서는 다른 것을 통해서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들이 그 자신을 통하여 하나의 존재로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적으로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실체이자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것 스스로 자신의 존재 원인이 아니다. 
그것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전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되었고,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하나의 자체적인 것으로 있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의 피조물은 능동인의 계열 속에서는 다른 것을 통해서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을 통해서는 형상인의 계열 속에 있다.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능동인의 계열과 형상인의 계열이라는 두 계열을 혼합하였다. 
그런 까닭에 실존하는 하나의 사물은 실존하기 위해서 실존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는 환영을 갖게 된 것이다.
  
토마스 형제의 경우에는, 실체 자체 속에서, 이들이 받는다고 가정되고 있는 바로 그 실존을 위한 어떤 일정한 영역을 발견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시거의 관점에서는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토마스는, 그것이 실체의 실존, 즉 실체 내에서 현존하면서, 실체로 하여금 있도록 만드는 원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것이 여전히 있는 것 속에서 원해지고나 있는 듯이! 
반면 토마스는 아비첸나가 실존을 하나의 우연자로 만듦에 있어서 잘못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실존이 하나의 실체도 우연자도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시거는, “어떠한 무엇임(whatness)도 있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개념적 가지성도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의 ‘무엇임’은 ‘실재의 실체성'으로 보인다.
 

질료・형상・우연자가 될 수 없는 실존
  
126-
시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많은 성식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내서, 이를 반박한다. 
“있다(esse)는 것은 사물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에 부가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우연자가 아니며 본질에 대해 부가되는 어떤 것이다.” 
이 언급은 시거에 의하면, 그 안의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다.

(1) 있다는 것은 어떤 것(aliquid)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것(quid)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있다는 것이 사물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참되지 않은데,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본질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확실히 본질이 갖는 있다이기 때문이다.
(3) 만약 그것이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동시에 어떻게 그것이 본질의 구성적 원리들로부터 생겨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실존과 분리되어서는 있지 못하는 그런 한 본질의 구성적 원리들 속에서 실존이 유래한다고 상정할 수 있지 않는가?
 
시거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우주를 설명하는 것인데, 실재에는 질료와 형상(이들의 연합이 실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우연자, 오직 세 가지만이 있다. 만약 실존이 전적으로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질료나 형상 또는 우연자일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는 실존은 우연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실존이 질료라고도 말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질료는 잠세임에 반해, 있다라는 것은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존은 형상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만약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실존은 본질에 부가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거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반박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우주 내에는 실존의 여지가 전혀 없다. 
그의 우주는 실존자들의 세계가 아니라, 사물들의 세계일뿐이다. 
실존은 무의미한 말이다. 
실재의 실존은 실재와 동일적이다.

 
최대의 현실성으로서의 본질
  
130
그러한 형이상학 내에서 본질, 실존, 사물 및 존재는 실재 자체에 관한 그만큼의 관점들이다. 
존재(Ers)는 현실적으로 있는 어떤 것(what actually is)을 의미한다. 
사물(res)은 존재를 늘상 점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의 사물을 있는 것(that which is)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와 “사물”은 동의어가 아니지만,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들이 꼭 같은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지시되는 것은 존재인 바의 사물이며, 마찬가지로 어떠한 존재라도 하나의 사물이다.
  
본질(essentia)이란 것은, 일차적으로는 존재가 현실적으로 있는 한, 존재에 속하는 실재성을 또는 존재의 점유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시거의 교설에 있어서 실존이란 것은, 현실성의 정도가 최고인 경우에서의 본질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충실히 구성된 어떠한 본질이라도 자신의 본래적 권리 고 실존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토마스의 차이
  
130-
아베로에스의 경우,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단순한 언어적 환영으로 생각하고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구조에 비춰봤을 때 그의 실존 개념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만약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을 따르지 않으려던 것이었다면, 과연 그러한 관점에서도 그의 철학이 단순한 환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의미한 “실존” 개념은,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실재를 구성한 세 가지 원리 외의 네 번째 구성 원리를 말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의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로서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세계이다. 
전체적으로 실존에 무관한 까닭에, 실존의 시작과 끝에 관해서, 또는 심지어 그러한 세계가 현실적으로 있는지를 아는 문제에 관해서도 아무런 물음이 생겨날 수 없다. 
세계는 있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해질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한 세계에 있어 창조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를 창조된 세계로 말하지는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걸 내에서, 신이 세계의 제1원동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제1의 형성자이기도 함을 항상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창조주가 아닌 제1형성자
  
132-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 시계의 제1원동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분은 “존재”라는 말의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존재의 원인이 될 수가 없다. 
하나의 단순한 물리적 원인으로서의 신은 형이상학적 원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 형성자라면, 그 이유는 그가 현실적으로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 바로 그들의 존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실존 없는 세계: 불변의 가지적 형상 세계
  
133-
하지만 이러한 교설 속의 세계는 여전히 창조된 우주가 아니다. 
하나의 세계 형성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실체들의 영원성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보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영원히 지속하는 실체, 즉 하나의 실체적 현실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분의 현실성은 자체적인 현실성이다.
  
지상 세계의 가지적 실체들은 너무도 하약해서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속하거나 존속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른바 어떤 질료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이 종들이다. 
가지적인 형상들, 실체로서 영원한 형상들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른바 무한히 많은 개별자들을 관통하는데, 개별자들은, 자신들의 형상을 그것에 힘입고 있는, 그런 종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를 계승하고 대체한다. 
그들의 종은 존속하기 위해서 그들을 이용하며, 그 결과 각각의 그들에게 있어서는 개별자가 아니라 종이 참된 실재이며, 이러한 종은 영원하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자신의 신적인 형성자에게, 자신의 실존 이외의 모든 것을 힘입고 있다. 
세계는 항구적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는 세계일뿐이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세계는 아무런 역사도 갖지 못하고, 어떤 새로움도, 발전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체의 세계는 죽은 존재 덩어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0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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