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노직의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의 3장에는 경험 기계(experience machine)에 대한 사고 실험이 등장한다. 경험 기계는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기계이다. 그 기계에 들어가면 두뇌에 전극이 연결되고 생애의 체험이 모두 미리 처리되어 뇌에 이식된다. 기계에 연결될 때 잠시 약간 고통스러울 뿐, 경험 기계 속에 있는 사람은 기계 속에 있는 동안 자신이 기계에 연결되었는지를 모른다. 이런 기계가 있다면 그 기계에 들어갈 것인가? 경험 기계에 평생 연결되어 있기를 바라겠는가? 2년 간 경험 기계에 들어 있다가 2년이 지난 후 경험 기계에서 잠시 나와서 다음 2년의 경험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노직은 아무도 이런 기계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우리는 어떠한 것을 단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한다. 둘째, 우리는 미결정된 덩어리가 아니라 어떤 방식, 어떤 종류의 인간이기를 원한다. 셋째, 경험 기계에 연결되는 것은 우리를 인공 현실, 즉 인간이 구성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심오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세계로 제한한다. 노직은 우리가 경험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경험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의 문제 외에도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현실과 접촉하여 능동적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사는 일이다. 경험 기계에 특정 기능이 추가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을 그들이 대신 산다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경험 기계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정말 없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주변의 과학철학 전공 대학원생 중 3분의 2는 경험 기계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애인과 교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애인이 있잖아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잖아요? 경험 기계에 들어가는데 둘이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경험 기계에 혼자 들어가면 혼자서 두 사람이 백년해로 하는 경험을 하고 애인은 다른 남자랑 행복하게 살든 불행하게 살든 어떻게 사는 거예요. 이런 상황이면 어때요?” 이렇게 말했는데도 대학원생들은 경험 기계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들은 오히려 나보고 왜 경험 기계에 안 들어가느냐고 물었다. 그러게, 나는 왜 경험 기계에 들어가기 싫을까?
이번에는 조교 일을 하는 수업의 학부생들에게 물어보았다. 학부생들은, 대학원생들과 달리, 열 명 중 두 명만이 경험 기계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 중 한 명은 지금 배울 것이 너무 많아서 경험 기계에 들어가서 다 배우고 나오겠다고 했다. 외국인 학생이었는데, 아마 경험 기계를 ‘시간과 공간의 방’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학부생들과 대학원생들의 반응이 왜 이렇게 다를까? 학부생들은 아직 살만하고, 꿈도 있고, 미래도 있고, 희망도 있어서 그런 것인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노직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경험 기계에 안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한 것만 봐도 그렇다. 노직은 25세에 프린스턴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30세에 하버드 철학과 정교수가 되었다. 왜 경험 기계에 들어가고 싶겠는가. 노직이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이 비슷했을 것인데, 아마도 노직 동료들도 노직 같은 사람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 뱀발: 내 이야기를 들은 학부 선배는 다음 논문을 소개해주었다. 나중에 읽을 생각이다.
Frank Hindriks and Igor Douven (2017), “Nozick’s experience machine: An empirical study”, Philosophical Psychology 31(2): 278-298.
(2019.09.26.)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답글삭제고맙습니다.
삭제대학원생.... 그들은 역시 사람이 아닌가보다... 사람답게 살 수 없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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