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9

[인식론] Dretske (2005), “The Case against Closure” 요약 정리 (미완성)



[ Fred Dretske (2005), “The Case Against Closure”, in M. Steup and E. Sosa (eds.)(2005), Contemporary Debates in Epistemology (Blackwell), pp. 13-26. ]

1. Transmissibility

2. Closure

3. Heavyweight Implications

[13]

(R) S regrets P

S knows that P implies Q

Therefore, S regrets Q

(K) S knows P

S knows that P implies Q

Therefore, S knows Q

(R)은 타당하지 않은 논변이라면, 왜 (K)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어야 하는가?

[14]

지식은 논리적 함축 관계에 닫혀있지 않음.

(K)는 타당한 논변이 아님.


1. Transmissibility

[14]

P의 무거운 함축인 Q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무언가 다른 근거들이 더 필요하다. 

병에 와인이 남아 있는 것을 맛을 보고 알았지만 그러한 미각적 근거가 ‘와인이 남아 있다’가 함축하는 사실 ‘착색된 물이 아니다’를 알게 만드는 이유가 되지 못함.

그것들은 다른 방법들을 통해 확인되어야 함.

역시 병속의 쿠키를 보는 것이, 우리와 독립된 물리적 세계가 있음을, 관념론이 옳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것은 아님.


[15-16]

Q. P를 알기 위해 사용한 증거가 P가 함축하는 Q를 아는 데에 있어서 증거로 작용하는가?

A. 그렇지 않다. 증거의 효력은 함축관계를 따라 전달되지 않는다.


(T) R is a reason for S to believe P

S knows that P implies Q

R is a reason for S to believe Q


(T)는 타당하지 않은 논변임.

우리가 P를 지각할 때, P의 무거운 함축은 같은 방식으로 지각될 수 없음.

가벼운 함축에 대한 전달(transmission to lightweight implications)

내가 병 안에 쿠키가 있음을 본다면, 나는 병이 비어있지 않음을 확실히 볼 수 있고, 병에는 어떤 것이 있음.

지각의 경우, P의 지각적 근거는 그것의 무거운 함축에 대해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무거운 함축이 항상 있음.

그러한 효력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가벼운 함축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

전달가능성의 이러한 문제들은 폐쇄성 원리를 결정적으로 논박하는 것은 아니다. 폐쇄성 원리를 지지하는 이들은 S가 P를 알기 위해서 이용한 근거가 Q를 알게 만드는 근거가 되지 않음을 인정할 수 있다. 대신 그들은 P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Q를 알아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폐쇄성은 유지된다.



2. Closure

[16]

폐쇄성 원리는, 당신이 P가 Q를 함축함을 안다면, 당신이 P를 알기 위해서는 Q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

앞서 P를 알기 위한 근거들이 Q를 알기 위한 근거가 되지 않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폐쇄성 원리를 따른다면 P를 알기 위해서는 Q를 알기 위한 다른 근거들을 더 찾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S는 P를 알지 못한다.


[16-17]

물리적이고 마음-독립적 세계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병 안에 쿠키가 있음을 알 수 없는가?

폐쇄성의 원리를 따르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회의론이 옳다. 우리는 대부분의 함축을 알며, 폐쇄성의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무거운 함축에 대해서는 폐쇄성의 원리를 거부할 수 있다. 이러한 거부는 추론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함축 관계에 대해 그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17]

“냉장고가 비어있다. 그러나 냉장고는 무언가로 가득하다”는 이상한 연언이지만 참임.

‘비어있다’는 것은 음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가득하다’를 공기 분자들로 가득 차 있음을 의미한다면,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으며, 일상적인 예측을 벗어날 뿐임.

두 연언지 양쪽 모두 모순 없이 옳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문장이 아니다. ‘나는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지만, 손이 없는 통속의 뇌가 아니다’는 문장 역시 터무니없지 않다. 두 번째 연언지는 첫 번째 연언지를 단언할 때, 통상적으로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가능성을 도입한다. 다시 말해 유관한 가능성들(대안)이 중요한 문제다.


맥락주의 비판 [18]

철학자들은 폐쇄성의 거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회의주의를 다룰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주장할 것임.

인기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지식 귀속(knowledge attributions)을 정당화 맥락에 민감하게 만드는 것

통상적 맥락에서는 보통 지식에 필요한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속에 얼룩말이 있는 것도, 병속에 쿠키가 있는 것도 안다. 따라서 이를 의심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우리의 앎은 유지된다. 회의론을 부정할 수 있다. 


[]

폐쇄성을 유지한다면, 통상적 맥락에서는 외부의 물리적 세계의 존재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무거운 함축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다. 만약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고민하면, 손에 쥐고 있었던 지식은 증발해 버린다. 따라서 이렇게 변화된 맥락에서는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하면 안 된다. 이것은 폐쇄성을 거부하는 것보다 더 얄궂은 결과를 가져온다. 폐쇄성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면 안 되며, 적절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


[유관한 대안의 배제]

지식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하면, 자연스럽게 폐쇄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P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대안이 아니라, 모든 유관한 대안을 배제해야 한다. 병 속을 들여다 본 증거는 나로 하여금 병 속에 쿠키가 있음을 알게 하나, 병 속에 교묘하게 만들어진 가짜 쿠키가 있음을 알게 만들지는 않는다. 보통 가짜 쿠키는 유관한 대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19-20]

더 나아가 지식이 결정적인 근거에 기초한 믿음이라고 하면, 역시 폐쇄성은 무너짐.

누군가가 P의 알려진 귀결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지 않더라도 P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 R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임.

다음의 예들을 보자.


(C) 병 안에 쿠키가 있지 않았다면, 병 안에 쿠키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C*) 병 안에 교묘하게 만든 쿠키가 있었다면, 병 안에 쿠키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C)는 참이고 병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 안에 쿠키가 있다고 믿을만한 결정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C*)는 틀렸다. 따라서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이 함축하는 것(병 안에 가짜 쿠키가 있는 것이 아니다)을 믿기 위한 결정적인 근거를 경험에서 얻을 수 없다.



3. Heavyweight Implications

[지식의 원천들과 폐쇄성 원리의 충돌]

지각에 의해서 아는 것들은 언제나 무거운 함축을 가진다. 만약 폐쇄성의 원리를 따라 병 속의 쿠키를 보기 위해 외적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면, 그 외부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들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것의 증거가 그 어떤 것의 모든 함축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아론이 틀렸다거나 외부의 물리적 세계가 있다는 이러한 함축은 분명 지각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습득되어야 할 지식이다. 


[]

[]

증언은 지각과 구별되는 다른 중요한 지식의 원천이다. 타이어를 내가 직접 보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타이어가 구멍이 났다고 말하면,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외부 세계의 존재 여부가 증언으로 해결되는 문제인가? 물질적 세계가 있음은 우리가 말한 것에 의해 함축되는 어떤 것이며, 단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폐쇄성 원리를 유지한다면, 증언을 비롯한 책, 신문 텔레비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 교육체계가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이 그 자체가 물리적 세계를 보증하거나 또는 다른 방도를 찾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런 지식도 가지지 못한다.


[지표들이 말하는 것]

P가 참임을 알게 되는 때에는 언제나 어떤 지표가 있고 정보의 원천이 되는 것이 있다. 그것들이 P가 참임을 말해준다. 직접적 지각은 상황 P의 경험을 기술한다. 증언 등의 경우에는 보다 간접적인 방식인 말의 형태나 자연적인 신호(sign) 등으로 P에 대한 지표를 제공한다. 사진과 측정기기들도 무언가를 지표로 내어놓으며 정보들을 운반한다. P임을 아는 방법들은 항상 어떤 것이 있을 때, 그것들이 드러내는 속성으로 P가 참이라는 지표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정보를 운반한다. 이러한 지표나 정보들은 분명 P와 유관하나 P가 함축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이를 테면 어떤 측정계를 생각해보자. 그 기기가 지시하는 값인 Q가 5라고 하면, Q-측정계는 Q의 값이 5라는 것을 지시할 뿐이며, 기기가 고장, 이상작동, 또는 잘못된 표시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설령 기기가 이상적으로 작동한다고 해도 그런 정보들은 기기가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해당 기기의 임무가 아니다. Q-측정계의 일은 Q값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그 정보제공의 신뢰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간에 Q-측정계의 신뢰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측정기를 노려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

이것은 모든 지표, 모든 정보의 원천에 참이다. 외부의 물리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기기가 없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지시계는 병 속에 쿠키가 있다는 것만 말해줄 뿐, 그것의 무거운 함축까지 전달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연료계는 물리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 없이 연료탱크에 가솔린이 얼마만큼 차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세계가 실은 오늘 아침에 만들어졌다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서도 출생증명서는 언제 누군가 태어났다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과거의 실재나 물리적 세계에 대한 회의론에 대한 답변은 출생증명서나 나이테를 조사한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

P를 아는 것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P에 의해 전달된 정보에 의존한다면, 우리 세계에서 그러한 신뢰도를 보장하는 방법은 없다. 물리적 세계에 대한 보장도 없고, 사람들이 마음이 없는 좀비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만한 방도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회의론이고 두 번째는 폐쇄성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

누구든 물리적 세계에 대해서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한다면 선택지는 간단하다. 폐쇄성을 거부해야만 한다. 단지 함축 관계를 안다는 것으로 함축되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물리적 세계의 존재를 알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을 함축하는 쿠키의 존재는 알 수 있다. 


[]×2

(2017.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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