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1

철학은 1등만 살아남는가?



예전에 어떤 대학원생이 “철학은 1등만 살아남는 곳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꼭 1등 안 될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한다.

1등만 살아남는다는 것이 교수 임용되어서 안정적인 소득을 얻고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그 많은 교수들이 죄다 1등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1등만 살아남는 곳이 철학뿐인가? 물리학은 안 그렇고 경제학은 안 그런가? 웬만한 학문은 다 그렇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지금 잘 나가는 교수・박사・연구원들 중에도 역사에 이름이 남을 만한 사람은 몇 명 없을 것이다. 『지식의 반감기』에도 나오듯이, 과거에 생산한 지식은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절반만 살아남았고 또 그만큼 시간이 지난 후 남은 절반 중에서 또 절반만 살아남았다. 한 세대 전에 출판된 논문 중에서 대학원 수업에서 읽는 논문이 얼마나 될 것인가? 추세대로라면 지식의 반감기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학계에서 주목받는 건 몇몇 뛰어난 개인이겠지만 그 사람들만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사람이 잘 나고 똑똑하다고 학문 공동체가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하는 사람도 있고 교육하는 사람도 있고 행정 보는 사람도 있어야 공동체가 돌아간다. 뉴튼이나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들만 학문 공동체에 기여한 것이 아니다. 고등학생이 미적분을 배울 수 있도록 만든 수많은 연구자와 교육자들도 뉴턴이나 라이프니츠만큼이나 학문 공동체에 기여했다.

주목받는 연구자도 혼자만의 힘으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자들의 요약과 정리는 다른 연구자들이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을 줄여준다. 필사하고 요약하고 정리한 사람들이 후대 연구자들에게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는 철학사 곳곳에 나온다. 그런 식으로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남기지 못한 연구자들도 학문 공동체에 충분히 기여한다. 티가 안 나고 기억되지 않아서 그렇지 어떻게든 학문 공동체에게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다른 연구자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에 기여한다.

학문의 세계에서 1등만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군가의 지적 성과를 개인의 차원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학문 공동체 차원에서 본다면 지적 성과는 공동체 전체가 협업하여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주목받지 못한 연구자의 작업도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먹고 사는 문제나 저-성과자로 퇴출되는 것은 걱정하지만 학문적으로 사느냐 죽느냐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201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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