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서는 아무 말이나 그럴싸하게 잘 꾸미기면 다 용납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말이나 막 했는지 어떤 선생님은 교양서적에 이런 말을 써놓기도 했다.
도덕의 문제도 ‘도덕 전문가’가 따로 있다. 도덕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윤리학자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덕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도덕 문제에 대해서는 개나 소나 발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과학자는 생명・의료윤리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발언은 어디까지나 참고만 할 수 있을 뿐, ‘적합한’ 전문가의 발언은 아니다. 생명과학자는 생명 문제에 관해서는 전문가이지만 윤리・도덕 문제에 관해서는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다. 종교 지도자는 도덕에 관한 발언을 자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가 도덕에 관한 ‘적합한 권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는 ‘그 종교의 도덕’에는 전문가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따라야 할 도덕의 전문가는 아니다. (최훈, 136-137쪽)
“개나 소나”라는 말은 내가 웃기려고 덧붙인 것이 아니라 실제 원문에 있는 말이다. 얼마나 짜증 났으면 교양 서적에서 “개나 소나”라는 표현을 썼을까?
관리 안 되는 철학과의 일부 학생들에게는 생각 안 하고 아무 말이나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전공 수업에서도 아무 말이나 하며 대체로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왜 그럴까? 옳고 그름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그에 맞추어 판단해야 하지만, 좋고 싫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좋고 싫음의 문제인 것처럼 슬쩍 바꾸면, 멍청한 데다 무식하기까지 한 사람조차도 마치 뭔가 그럴듯한 견해가 있는 것처럼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통제되지 않는 철학과 수업에서 난장판이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학생에게는 어떠한 교육적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윤리학자 루이스 포이만과 제임스 피저가 제시하는 방법은 일종의 충격 요법이다.
나는 철학 강의 초반에, 주관적 상대주의를 격렬하게 옹호하는 학생들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이들은 “판단하는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첫 번째 과제를 내준다. 다음 수업 시간에 나는 모든 답안지에 “F”를 써서 되돌려준다. 내가 쓴 논평들을 보면 대부분의 답안지가 우수했음을 알 수 있지만 말이다. 학생들이 이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면(몇몇 학생들은 이제껏 자신들의 과제물에 그런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학생들이어서 그 의미를 묻기도 한다), 나는 채점을 함에 있어서 주관주의를 받아들였노라 대답한다. “하지만 그건 부당합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 더 이상 윤리학에 관해서 주관주의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포이만・피저, 49쪽)
* 참고 문헌
최훈, 『변호사 논증법』 (웅진지식하우스, 2010).
루이스 포이만・제임스 피저, 『윤리학: 옳고 그름의 발견』, 박찬구 외 옮김 (울력, 2019).
(201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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