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3

<당팔고에 반대한다>에서 배우는 글쓰기



<한겨레>나 <경향신문>에 가끔씩 별 내용도 없으면서 괜히 읽기 어려운 칼럼이 실릴 때마다 나는 모택동이 쓴 <당팔고에 반대한다>라는 글을 떠올린다.

‘당팔고’에서 ‘팔고’는 명청시대 과거시험에서 쓰인 문체를 가리킨다. 명청시대 과거시험에서는 정해진 형식에 따라 답안지를 작성해야만 했다. 팔고문(八股文)은 제목의 뜻을 설명하는 파제(破題), 제목을 부연 설명하는 승제(承題), 1편의 강령을 서술하는 기강(起講), 본론으로 들어가는 부분인 입제(入題), 본론의 근거를 제시하는 기고(起股), 본론의 핵심 내용을 논술하는 중고(中股),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는 후고(後股), 결론 부분인 속고(束股)로 구성된다. 기고, 중고, 후고, 속고는 각각 서로 대구를 맞추어야 하고 문장 형태와 글자수가 모두 완전히 대응되어야 한다. 명청시대 과거시험에서 쓰인 형식의 글을 팔고문이라고 부른 것은 기고, 중고, 후고, 속고가 모두 여덟 단락(八股)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공맹과 정주의 말투를 모방하여 경직된 형식의 글로 써야 했으므로 팔고문으로 된 글은 대부분 모호하고 뜻이 통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택동이 반대한 “당팔고”는 당시 작가나 지식인들의 문체가 명청시대의 팔고문처럼 현학적임을 빗대어 가리킨 것이다.

모택동이 <당팔고에 반대한다>를 쓴 것은 섬서성 북부의 연안에서였다. 이 때는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 세력을 포위 토벌하면서 중국 공산당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고, 학생과 청년 뿐 아니라 다른 성의 난민들도 연안으로 몰려와서 생활 수준이 악화되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작가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내용 없고 읽기 사나운 글이나 쓰고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문맹이거나 몇 글자 아는 정도인데도 그들은 그랬던 것이다.

모택동은 당팔고를 “5.4 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규정한다. 5.4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비교적 구어에 가까운 백화문을 사용하자고 했고, 당팔고를 쓰는 사람들은 이에 대한 반동이라는 것이다. 모택동은 왜 이렇게 공허한 글을 길게 쓰느냐고 묻는다.


우리의 어떤 동지들은 글을 길게 쓰기를 좋아하는가. [...] 왜 이렇게 꼭 길게 쓰려고 하고 게다가 공허한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해석이 있을 뿐으로, 대중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길면서도 공허하기에, 대중들이 보자마자 고개를 흔드는 판에, 어떻게 계속하여 읽어 가려 하겠는가. 그 같은 글들을 유치한 사람들을 속이는 데밖에 소용이 없으며, 그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글은 나쁜 영향을 퍼뜨리고 나쁜 습관을 조성한다.


[...] 지금은 전쟁 시기이고, 우리는 글을 어떻게 짧게, 정수를 쓸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연안은 아직 전쟁이 없지만 군대는 매일 전방에서 싸우고, 후방도 사업이 바쁜데 글이 지나치게 길면 누가 보려 하겠는가? 어떤 동지들은 전방에서도 긴 보고서를 쓰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고생고생해서 써서 보낸다. 그 목적은 우리더러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감히 어떻게 그것을 읽을 엄두를 내겠는가?


모택동은 당팔고의 폐해로 건전한 비판과 토론이 방해받는 것을 꼽는다.


어떤 당팔고는 쓸데없는 빈말을 끝없이 늘어놓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티를 내며 고의로 사람을 윽박지르는데, 여기에는 아주 나쁜 독소가 들어있다. 빈말의 연속이나 글에 내용이 없는 것은 그래도 수준이 유치하다거나 할 수 있지만, 일부러 티내고 허장성세하며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것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무뢰(無賴)하다. [...]


과학적인 것은 언제나 남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은 진리이므로 결코 남의 반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관주의・종파주의적인 것이 당팔고식의 글과 연설에서 표현될 때 다른 사람의 반박을 두려워하고 아주 겁먹게 하며, 실속 없이 뽐내고 허장성세로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이것에 의해 사람들은 입을 다물게 되고 그들 자신들이 승리를 안을 수 있다고 여긴다. [...]


모택동은 연안 성벽에서 어떤 표어를 본 이야기를 꺼낸다. “노동자(工人) 농민 단결하여 항일 승리 쟁취하자”라는 표어에서 공(工)의 두 번째 획을 곧게 쓰지 않고 두 번 굽게 돌려서 쓰고 인(人)은 오른쪽에 삐침 셋을 더해 썼다고 한다. 모택동은 그 표어를 쓴 사람이 고대 문학사를 공부하는 학생인 건 알겠으나 왜 이렇게 썼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 자신의 글, 연설, 예기하는 것, 쓸 글을 누구에게 보일 것인가, 누구에게 들려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들려주지 않을 작정인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 화살을 쏘려면 과녁을 보아야 하고 경을 읽으려면 듣는 청중을 보아야 하는데, 글을 쓰고 연설을 하는 데 있어서 독자를 보지 않고 청중을 보지 않아도 되겠는가?


모택동이 당팔고에 대한 처방으로 <노신 전집>에서 일부를 뽑아 제시한다. 노신이 어떻게 글을 쓸 것인지 토론할 때 <북두잡지>사에 보냈던 답신이다.


첫째 갖가지 일에 유의하고 여러 번 보며 단지 한 번 보고 쓰지 말라. [...]


둘째, 써지지 않을 때는 억지로 쓰지 말라. [...]


넷째, 다 쓴 후 적어도 두 번은 보고 힘을 기울여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글자를 삭제하여, 조금도 유감스러움이 없게 하여야 한다. 소설의 재료는 스케치로 압축할 수는 있어도 스케치할 재료에서 소설을 끌어낼 수는 결코 없다. [...]


여섯째, 자기 이외에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형용사류를 억지로 만들지 말라.


진보 언론에 칼럼을 싣는 일부 진보 인사들은 연안 시기 지식 분자들의 실수를 따라하는 것은 아닌가? <당팔고에 반대한다>를 읽고 자신의 글 쓰는 습관을 반성해야 할 사람이 적지 않아 보인다.

* 뱀발

어떤 글 못 쓰는 사람들은 무조건 짧은 글이나 읽기 쉬운 글이 좋은 글이 아니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웃기지 말고 글이나 똑바로 쓰고 그런 소리를 하라고 답하면 되겠지만, 어쨌든 <당팔고에 반대한다>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자본론>은 길지 않은가, 그것은 또 어떻게 하느냐고 말이다. 이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자본론을 쭉 읽어 내려가면 된다. 속담에 이르기를, 산에 가면 그 산의 노래를 부르라 했고, 반찬에 맞추어 밥을 먹으라 했으며, 몸에 맞추어 옷을 지으라 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정황을 보고 처리해야 하며 글과 연설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빈말을 끊임없이 늘어놓으며 글에 내용이 없는 팔고문투이지, 어떤 것이나 다 짧은 것이 좋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201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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