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3

한국인의 문해력이 그렇게 낮은가?



한국이 OECD의 다른 나라보다 문맹률은 낮은데 문해력이 낮다는 보도가 가끔씩 나온다. <한겨레>는 노혜경 시인의 경험담을 보도하기도 했다.

노혜경 시인은 <국어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창비)에서 대학 국어교육 강사로 일하면서 느낀 학생들의 읽기 문제점을 언급했다. 그는 “자신이 읽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한 줄로 아는 ‘문해맹’이 대학에도 제법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대학생들에게 ‘철수가 미자를 두고 영희와 만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철수는 바람둥이다’는 문장에서 알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상당수가 “철수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니 나쁘다”거나, “철수는 바람둥이다”라고 답한다는 것이다. 문장에서 철수가 영희와 만나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일임을 명시하고 있는데도 곧잘 틀린 읽기를 하고 만다.

기사 내용대로 정말 대학생들이 똥멍청이들이 많은가? 과외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았다. 과외 학생들과 일대일로 있는 상황에서 신문에 나온 대로 “철수가 미자를 두고 영희와 만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철수는 바람둥이다”에서 알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중간고사에서 수학 40점을 받은 중2 학생은 질문을 듣자마자 “철수가 미자랑 사귄다는 거요”라고 답했고, 중간고사에 수학 40점을 받은 고1 학생도 질문을 듣고 약 1초 정도 머뭇거리더니 중2 학생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이번 중간고사에 수학 20점을 받은 학생만 “철수는 바람둥이라는 거요”라고 답했다. 대답을 똑바로 한 두 학생은 모두 한 달에 책 한 권도 제대로 안 읽는 평범한 아이들이다. 대학생이 이 아이들보다 이해력이 떨어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면 노혜경 시인이 대학에서 겪은 경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판단이 느리고 성미가 급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한 번 더 생각하기 전에 입으로 내뱉고 만다. 어디나 그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이나 물리학처럼 답이 딱 나오는 전공 수업에서 그들은 본래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성급함을 발휘하는 곳은, 학생들에게 의견을 묻고 토론을 유도하는 수업, 즉 교양수업이나 인문대 수업이다. 이런 학생들은 적극적이기까지 해서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나름대로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려 애쓰기도 한다.

교수가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의견을 묻는다고 해보자. 한국 학생들은 여간해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면 교수가 자기 물음에 자기가 답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언론에서 하도 토론식 수업을 해야 한다고 난리를 쳐서 괜히 학생들에게 한 번 더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한 번 더 물으면 꼭 앞에 앉은 성급한 학생이 명백히 틀린 답을 한다. 틀린 답이지만 그 학생의 답이 틀렸다는 것을 곧바로 지적하면 이후 수업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테니까, 교수는 다른 학생의 대답을 통해 맨 처음에 대답한 학생이 틀린 대답을 했음을 완곡하게 지적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학생도 맨 처음 대답한 학생과 비슷한 답을 한다. 유유상종이라서 그렇다. 이렇게 두 명이서 당당하게 틀린 답을 말하면, 맞는 답을 생각한 학생들도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입을 다문다.

수업이 구렁텅이로 가고 있다는 걸 직감한 교수는 다른 학생들의 의견도 묻는다. 원래 맞게 생각했는데 앞서 대답한 성급한 학생들의 영향을 받아 틀린 답을 말한다. 틀린 답을 말하는 학생이 많아질수록 남은 학생들도 ‘저 대답이 맞는가보다’ 하고 더 강하게 믿게 된다. 그렇게 한 강좌의 대부분의 학생이 똥멍청이 같은 대답을 한다. 교수는 ‘얘네는 이미 망했나 보다’ 하고 손을 놓는다. 수업 운영이 미숙한 교수나 강사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언론에서는 한국 사람들의 문해력이 낮다면서 마치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지만, 통계 자료에 따르면 성인 문해력을 포함해도 한국 사람들의 문해력은 OECD 평균이다.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다. 언론에서는 이것이 마치 큰 문제인 것처럼 보도하는데, 한국이 언제부터 선진국 소리 듣고 살았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문해력 통계 자료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따로 있다. <국민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2000년 PISA 보고서 중 ‘읽기 영역의 국가별 등급 분포’를 보면 한국은 핀란드에 이어 2위에 랭크됐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인적자원’에 속하는 최상위 등급인 5등급 비율은 6%에 불과해 5등급 기준으로 순위를 재산정할 경우 20위로 떨어진다. 핀란드는 5등급 비율이 18%나 된다. 권씨는 “우리는 PISA 결과를 보고 한국 학생들이 미국 학생들보다 훨씬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미국보다 학습 부진아가 훨씬 적어서 전체 평균이 높은 것일 뿐 최상위권 학생 비율은 미국이 우리보다 5%나 많다”고 말했다.

적당히 말귀 알아먹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율은 한국이 미국・프랑스・영국・호주・뉴질랜드・일본보다 높지만,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적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은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낮다는 말이다. 이 자료는 한국에서 지식과 정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수준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보다 낮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지식 생산자의 수준이 낮으면 지식 수용자들의 수준이 높아봐야 소용없다.

이것은 상위권 학생들이 자기 능력에 맞게 학습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수업은 중간 수준에 맞춰서 진행하기 마련이다.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중간 수준이 아니라 중상 수준이나 상 수준에 맞춰서 수업을 하고 평가와 지도를 엄격하게 한다면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세분해서 16-24세로 범위를 한정하면 한국인의 문해력은 OECD에서 4위가 된다. 이러한 통계는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는다. 우리 때는 책을 많이 읽었다. 요즘 애들은 스마트폰이나 하고 이모티콘이나 보내고 글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한다. 우리 때가 낫다”고 하는 어른들 말씀이 다 개뻥임을 뒷받침한다. 자발적으로 책을 안 읽는다고 해도 논술이니 뭐니 해서 그래도 나름대로 교육을 받은 요즘 애들이 그냥 방치된 채로 학창시절을 보냈던 어른들보다 못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 링크(1): [한겨레] “국어 지문, 모르는 단어 없는데 독해 어려워요”

( 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711527.html )

* 링크(2): [국민일보] 한국, 청소년 학업성취도 국제 평가 보고서 분석해보니… 인재급 비율 20위, ‘성인 문해력’ 중간 그쳐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119919 )

(20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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