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와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있다.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이런 이야기가 있다.
스티브 잡스가 광고대행사 관계자들과 신제품에 대한 TV 광고 시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광고 시안을 본 잡스가 광고에 신제품의 특징이 네 가지는 들어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러자 광고대행사 사장이 탁자 위에 있던 공책에서 종이를 찢어 구겨서 종이공 다섯 개를 만들었다. 그 중 하나를 탁자 건너편에 있던 잡스에게 던졌다. 잡스가 종이공을 잡자 광고대행사 사장이 말했다. “그건 좋은 광고입니다.” 다시 남은 종이공 네 개를 한꺼번에 잡스에게 던졌다. 잡스가 하나도 잡지 못하자 광고대행사 사장이 말했다. “그건 나쁜 광고입니다.” 잡스는 자기 고집을 꺾었다. (175쪽)
학부 교양수업 시험 감독을 하느라 KTX를 타고 대구를 다녀왔다. 기차를 타려고 승강장을 오르내리다 철도노조에서 계단에 붙여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KTX와 SRT를 통합하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중간에 뜬금 없이 “기차타고 런던까지”, “대륙철도시대”라는 문구가 끼어있었다. 그것도 “통합이 안전이다”와 “철도는 더 안전하게” 사이에 있었다.
나도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유능한 사람 중 일부만 교수가 된다. 통일이 되어야 어수선한 틈을 타서 나도 교수를 할 것 아닌가? 주체사상 가르치던 사람이 철학과 교수를 계속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사학과 출신 대학원생이 웃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통일 되고 동독 대학들의 사학과 교수들이 어떻게 되었는 줄 아세요?” 사학과 사람들도 통일을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KTX와 SRT 통합 사이에 “기차타고 런던까지”, “대륙철도시대” 같은 소리를 넣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물론, “통합이 안전이다”와 “철도는 더 안전하게” 사이에 “기차타고 런던까지”, “대륙철도시대”라는 문구를 억지로 끼워넣은 사람들은, 기차타고 런던까지 가는 대륙철도시대가 되는 것이 안보상의 위협이 사라지는 것이라서 철도가 더 안전하게 되는 것이고 통합(통일)이 안전인 것과 연관된다고 우길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교양수업이나 듣고 찡찡거리는 인문대 신입생 같은 소리다. 어떤 것과 다른 것을 합쳐서 의미가 풍부해지는 것과 너저분해지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꼭 그런 소리를 한다. 의미가 풍부해진다는 것은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현상들이 어떤 법칙이나 이론이나 모형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아무 연관도 없는데 괜히 어떤 것을 떠올릴 때 다른 것도 떠오른다는 이유만으로 둘을 붙이는 것은 그냥 너저분해지는 것이다. KTX와 SRT의 통합을 외세가 막는가, 아니면 남북 관계가 막는가? KTX-SRT 통합과 대륙철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그러면 이 둘을 왜 붙여놓은 것인가?
KTX 광명역에는 이미 “남북평화철도 광명에서 출발합니다”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써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어 있는데도 왜 굳이 KTX-SRT 통합 관련된 선전에 대륙철도 같은 소리를 끼워넣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대륙철도 같은 소리를 하고 싶어 죽겠어도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하는 것이 맞다. 정 그렇게 못 참겠으면 혼자 노래방에 가서 신형원의 <서울에서 평양까지> 같은 소리나 부르는 것이 개인에게도 좋고 조직에게도 좋겠다.
* 참고 문헌
유세환, 『결론부터 써라』, 미래의창, 2015.
(20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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