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rles Coulston Gillispie (2016), The Edge of Objectivity: An Essay in the History of Scientific Idea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
Charles Coulston Gillispie (1960), The Edge of Objectivity: An Essay in the History of Scientific Ideas (Princeton University Press).
찰스 길리스피, 「제1장. 완전한 원」, 『객관성의 칼날』, 이필렬 옮김 (새물결, 2005) 31-84쪽. ]
31-32
갈릴레오의 낙체의 법칙: “자연스러운 운동에서 통과한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갈릴레오가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상 언어,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뿐임.
35
갈릴레오가 낙체의 법칙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도형은 물리량에 적분을 적용한 최초 사례. 자연을 수학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
갈릴레오는 자연에 대한 판단력과 직관과 감각을 발전시켜서 수학적 기법과 철학적 주장이 뒤섞인 곳에서 물리학의 기본 요소를 골라냄.
이는 수리 물리학자가 토론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상황을 바꾼 최초의 기법임.
* * *
37-38
- 아인슈타인: “중국과 인도에서 왜 과학을 창조하지 못했는지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 과학은 매우 힘들고 성공하기 거의 어려운 일인데, 왜 유럽에서 과학이 시작되었는가?
- 과학은 그리스 철학의 유산에서 유래함
그리스인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질서 정연한 우주라는 개념을 만들어냄
자연에 관한 지식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을 통해 분리되기까지 철학의 일부분을 형성함
■ 그리스 과학과 근대 과학의 차이 [pp. , 38-39쪽]
- 그리스 과학의 특징
• 특징(1): 주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순수하게 지적임.
• 특징(2): 출발점이 정신이며 현상을 낯익은 말로 설명하기 위하여 목적, 영혼, 생명, 유기체 같은 개념을 사용함.
• 특징(3): 설명의 성공 여부는 보편성과 이성을 만족시키는 능력에 따라 결정됨.
• 특징(4): 실험을 하지 않음.
- 근대 과학의 특징
• 특징(1): 비-개성적이고 객관적임.
• 특징(2): 출발점을 자연에 두며 새로운 현상을 예측하고 새로운 개념을 제안함.
• 특징(3): 가능하면 수학적으로 표현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거침. 합리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계량적이고 경험적임.
• 특징(4): 자연을 이해함과 동시에 통제하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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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에 기성 권위에 대한 반역을 통해 근대 과학이 등장함.
중세시대의 과학을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허물어뜨린 것은 플라톤의 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pp. , 41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형이상학적이었으며 추론적임.
자연 현상을 논리 정연하게 하고 고도로 정교하게 관념화함.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기초는 상식으로 파악한 경험에서 출발하여, 정의-분류-연역을 거쳐서 논리적인 증명에 도달하는 방식의 추론.
실험과 방정식이 아니라 삼단 논법.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목표는 무수한 종속적 수단들이 어떻게 질서라는 커다란 목적에 들어맞게 되는가를 보임으로써,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달성하는 것.
직접적이고 미세한 관찰, 종에 의한 형상의 분류, 부분이 어떻게 전체에 봉사하는가에 대한 분석은 19세기까지 박물학에 유용한 것이었음.
플라톤 [pp. , 42-43쪽]
플라톤은 과학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과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만큼 영향을 미침.
사물의 세계에서 참을 제거하지만 이상적인 단순성을 수학적 현실로 확인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아이디어에 활기를 불어넣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론과 자연학을 구별하기 위해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물리적 용어로 바꿈.
우주론은 달 저편에 있는 천체의 영역에 관여하고, 자연학은 지상의 세계에 관계함.
다른 두 영역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함.
케플러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운동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천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원운동만이 완전한 것이었음.
피타고라스학파 [pp. 43-44쪽]
- 플라톤: “신은 항상 기하학적으로 생각한다.”
-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연의 본질은 수라고 확신함. 수는 사물의 형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실재하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것이라고 믿음.
• 영향(1): 머튼 규칙은 기하학적 비율로 이해하게 함. 이는 갈릴레오가 낙체를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도록 함.
• 영향(2): 수비학, 노스트라다무스, 장미십자회의 연금술
그리스 철학에서는 불가능한 수리물리학 [pp. , 44-45쪽]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과 물리학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함. 그들에게 수리물리학(수학과 물리학의 결합)은 불가능한 일.
- 플라톤: 수학적 관계는 영속적이고 이상적이므로 실재이며 참. 사물의 세계에는 그러한 확실성이 없음.
- 아리스토텔레스: 수학은 참이지만 추상적인 것에서만 참임. 물리학은 현실 세계를 다루며, 현실 세계는 성질⋅형상⋅미묘한 특성들로 이루어져 수학을 통해 표현할 수 없음.
-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법칙 등을 통해 불가능해 보였던 기하학과 물리학의 결합을 보여줌. 하지만 그의 출현은 너무 늦은 것이었음.
- 아르키메데스가 죽은 지 1700년 후 갈릴레오가 정역학을 운동에 적용하여 오늘날의 역학을 창시함.
* * *
고대의 지동설과 천동설 [pp. , 46-47쪽]
- 고대인들이 정확한 관찰자였다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함.
- 행성의 역행 운동과 같은 불규칙성은 태양 중심 모델에 의해 해결될 수 있었을 것.
• 피타고라스 학파는 태양이 중심에 위치한다고 믿었고,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310-230 B.C.)도 이러한 설을 제안함.
- 당시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85-165 A.D.)의 완전한 기하학적 천문학을 수용함.
• 프톨레마이오스는 주전원(epicycle), 이심원(eccentric), 대심(equant)이라는 구조를 사용하여 천체의 겉보기 운동을 합성함.
• 고대 로마부터 16세기까지의 역(달력)의 계산을 뒷받침하는데도 충분한 기능을 함.
48-
-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1543년)
이 책에 든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까지의 낡은 형식을 그 근본원리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것.
- 그의 학설은 태양계의 배치를 바꿈.
태양계의 중심에 태양이 있고, 움직이지 않는 지구를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만들었으며, 1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돌게 만듦.
-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이 상식의 흐름에 대항하여 얼마나 강하게 거슬러 올라가야 했는가는 고려한다면 그의 사상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그 시대는 관성의 원리도 운동의 합성도 알려지지 않은 시대.
지구가 움직인다면 우리는 공중으로 팽개쳐지는 것처럼 느껴야 할 것.
탑 위에서 떨어지는 돌은 탑 서쪽에 떨어져야 하며, 서쪽을 향해 발사된 포탄은 동쪽으로 발사된 포탄보다 멀리 날아가야 함.
갈릴레오: “그러나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에는 이성이 오감을 제압하여 그 주인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나는 찬탄을 금할 길이 없다.”
50-52
코페르니쿠스는 1505년 또는 1506년에 아리스타르코스적 생각의 단순성과 우아함을 깨달음.
그의 체계는 수학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으며 아주 틀린 것도 많았음.
그의 연구가 완성되었지만 그 중심적인 내용의 멋진 단순성을 입증하기는 불가능
이후 수많은 모순에 압도되면서도 기가 꺾이지 않고, 온갖 곤란에 직면하면서도 그의 생각을 고수함.
과학에서 이론이 수행하는 합리화의 역할 및 사물에 궁극적 이치가 들어 있다는 신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대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우월성은? [54-55]
그 당시 코페르니쿠스체계의 우월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당시의 학문적 전통은 태양 중심설과 지구 중심설은 기하학적으로 교환가능한 것이었으며, 특별히 태양 중심설을 취해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다는 쪽이었음.
천체의 위치를 예측하고 역을 만드는 등의 일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보다 우월한 점을 보여주지 못했음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우월성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것이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가 보여주지 못했던 장대한 규칙성을 제시한다는 점.
그러한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은 데이터가 완성된 미래에 가능한 것이었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의의 [56-57]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물리학의 발달에 기여한 중요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것
또한 상상력의 날개를 펴도록 자극하는 면이 있음.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면 세계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우주의 둥근 지붕에 별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얼마나 깊은 공간에 놓여있을까?
이런 생각은 공간과 세계에 무한성을 부여하는 것이었음.
이러한 용감한 상상력은 비극으로 인도하기도 했음.
조르다노 브루노의 무한한 우주에 대한 용감한 주장은 그를 화형으로 인도했음.
* * *
케플러의 법칙 [57-58]
- 케플러: “나는 코페르니쿠스의 견해가 참임을 고백하며, 황홀하게 그 조화를 명상한다.”
-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보완할 세 가지 법칙을 제안함.
법칙(1): 행성은 타원의 한 초점에 놓인 태양 주위를 타원 궤도로 돎.
법칙(2): 행성의 속도가 변하더라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양이 있다. 행성이 공전할 때, 태양과 행성을 이은 가상의 선이 휩쓰는 면적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만큼 움직임.(1609년 『새로운 천문학』)
법칙(3): 행성 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함.(1619년 『우주의 조화』)
케플러 [58-59]
- 케플러의 시대까지 원은 우주 질서의 기초였는데, 케플러는 어떻게 행성이 타원궤도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 케플러는 무엇이든 털어놓는 사람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의 만남 [59-61]
- 티코 브라헤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자연을 관측하고 실험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함. 그러나 그에게는 이론적 통찰이라는 자질이 결여됨
- 티코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지 않음.
- 덴마크 귀족인 티코는 왕에게서 받은 흐벤섬에 천문대를 세우고 조교들과 20년 간 매일 행성을 추적하여 천구의에 기입함.
-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 때문에 은둔하던 케플러가 티코의 연구에 참여함.
- 티코는 케플러에게 고도의 이론적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관측 결과를 사용하게 하여 티코 학설을 수립하도록 케플러를 구속하려 함.
- 1600년 그들의 만남이 있은 1년 후 티코는 사망하고 케플러가 티코의 데이터를 물려받음.
어떻게 타원 궤도를 발견하게 되었을까? [63-]
- 케플러는 티코의 숫자들에 근거하여 화성의 궤도를 연구함.
이미 궤도의 기하하적 기술과 물리학적 기술을 일치시켜야 하며, 공간에서 실제 곡선을 다루어야 하며 주전원의 조합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함.
- 케플러의 출발점은 태양 반대편의 화성 위치를 나타내는 숫자
- 5년 동안 70번 이상 계산하여 화성 궤도의 값을 얻었고, 관측된 위치와 이론을 통해 예상한 위치 사이에는 8분 정도 각도가 어긋남.
- 8분 정도의 각도 차이는 아주 적은 차이였고 티코 이전이라면 발견되지 않았을 것임.
- 케플러는 이 8분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6년을 연구함. 이는 케플러의 양심을 증명함.
- 이 8분이 원을 깨뜨리는 결함이라는 것이 판별되고, 케플러는 화성 궤도가 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함.
- 이러한 사실들과 케플러의 법칙들의 발견 사이의 관계는, 과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은 종종 커다란 문제가 아니라 사소한 모순임을 보여줌.
타원 궤도에 대한 또 다른 증거들 [65-66]
- 케플러가 생각한 달걀형 궤도와 완전한 원 사이에 생긴 초승달 모양의 최대폭은 반지름의 0.00429배. 화성에서 태양과 궤도 중심에 그은 선분이 이루는 최대각이 5도 18분.
- 케플러는 이 각의 시컨트(secant) 값이 1.00429라는 것에 놀람. 이는 타원을 정의하는 조건 중 하나였고, 안타깝게도 케플러는 시험 과정에서 산술적인 실수를 저지름.
케플러 제3 법칙의 발견의 배경 [67-68]
- 케플러의 법칙들은 역학이라는 하나의 통일 체계로 환원될 수 있는 현재와 같은 과학이 될 수 없었음. 해석 기하학이 아직 없어서 그 법칙들이 유도되지 않음.
- 그 법칙들은 케플러가 청년 시절에 구상한 다섯 개로 구상한 우주 구조를 뒷받침하지 않음.
케플러에게 타원은 결국 원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대용품이었기 때문에 “거름 마차”라고 부름.
- 그러는 동안 갈릴레이의 망원경과 목성 위성에 관한 소식이 들려옴.
- 케플러가 별점을 쳐 주었던 루폴프가 폐위됨.
- 이후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수학 교사 자리를 얻어 『우주의 조화』를 집필하기 시작함.
[68-69]
- 케플러는 타원보다 더 깊이 내재한 사물의 근거를 찾으려고 함.
세계의 조화를 찾기 위해 조각 그림 맞추기 놀이처럼 여러 방식으로 시도됨
- ......
- 제3법칙에 도달함. 행성의 운동과 거리의 관계, 태양계의 운동과 구조의 관계를 수립함.
- “나의 책은 100년 동안 독자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신은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명상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6천년이나 기다리지 않았던가.”(케플러 『우주의 조화』 제3법칙 서문)
* * *
갈릴레오의 객관성은 어떻게 표출되는가? [70]
- 갈릴레오의 플라톤주의는 피타고라스적 전통보다는 아르키메데스적 전통을 계승함
- 우주의 구조에서 감각성, 경건한 윤리, 교훈 등의 애매한 요소들을 제거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유클리드적 차원의 견실하고 곧은 뼈대만을 남김.
[71]
- 갈릴레오는 물체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함. 그 차이는 객관과 주관의 차이.
- 제1성질: 길이, 넓이, 무게, 모양등 수량화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인 성질
- 제2성질: 색, 맛, 냄새, 감촉 등 물질에 속한 본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지각 양식
[71-72]
- 아리스토텔레스 운동론에서는 포탄이 비행을 지속하는 것은 그것이 날아간 자리에 있는 공기의 압력에 의해서라고 함. 여기서 공기는 저항도 되고 추진체도 됨.
- 14세기의 장 뷔리당 학파와 파리대학 학파는 포탄에 운동의 원인으로서 임페투스(impetus)가 주어진다고 함.
갈릴레오의 독창성과 혁명성은 어디에 있는가?
갈릴레오가 윤리에 미친 부정적 영향 [74-75]
- 갈릴레오는 자연의 모든 것을 제1성질로 환원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제2성질로 분류하여 과학과 윤리학 사이의 불화가 시작됨.
과학의 객관화는 자연에의 모든 목적론적인 의미를 제거함으로 세계는 허무주의에 노출됨.
과학자는 측정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도덕적 책임을 스스로 해제했고,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행사하지 않게 됨.
과학자의 성격이나 윤리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그들의 업적에 대한 판단을 분리하라는 요청을 받는 시대는 갈릴레오로부터 시작됨.
[76-]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지니고 있던 주관성 즉 목적론적 물리학을 완전히 바꾸어 객관적 물리학으로 만듦.
갈릴레오의 세계는 공감보다는 오히려 측정에 의해 파악됨.
갈릴레오는 그의 낙체의 법칙에서 시간을 순수한 물리 현상의 매개 변수로 취급하여 운동을 수량화함.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이루는 혁명적인 것이었음.
갈릴레오는 물체의 낙하 거리와 속도에 관한 일반적 표현을 발견하려 시도했고, 결국 속도를 낙하 시간과의 관계로 표시하는 데 성공함.
갈릴레오: “자연의 책은 수학으로 기록되어 있다”
[78]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관찰하면서 천체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됨.
구멍투성이의 달 표면, 태양의 흑점 등
그리고 토성의 위성들의 발견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의 정당성을 추론할 수 있게 함.
그러나 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음.
케플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라고 말했는데, 이는 어느 스콜라 철학자들이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의 일임.
갈릴레오와 교회와의 반목의 원인
갈릴레오와 교회의 분쟁은 종교의 과학에 대한 원천적 적의나, 진리와 지식 사이의 반목에서 유발된 것은 아님.
그것은 과학자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 기인함.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거론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갈릴레오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임.
신앙과 도덕과 문명의 질서를 지배하던 로마 성직자들이, 상식과 정통 종교에 대항하여 기존 자연철학의 구조를 뒤엎으려 하는 갈릴레오의 정열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임.
추기경과 수사들은 수리적 추론에는 완전히 무지했으며,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힘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임.
갈릴레오의 한계 [81]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갈릴레오도 그와 같은 경향을 보임.
갈릴레오는 천체와 지상을 단일 물리학으로 결합하는 수리 과학을 수립하려는 열망,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대신할 통일적 우주상을 얻으려고 갈망함.
갈릴레오는 운동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이 지속된다고 하여 보존 법칙과 힘의 법칙으로의 길을 열었지만, 뉴턴의 제1법칙과 고전 동역학의 기초가 되는 관성의 원리를 정식화하지는 못함.
왜냐하면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완전한 수리화 사이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때, 그 역시 질서 쪽을 택했기 때문임.
그리스에서 과학의 기능은 우주를 단일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설명하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현상만을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임.
설명가능한 우주, 우리에게 적합한 우주는 유한해야 했음.
관성의 법칙은 무한을 전제함.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체는 무한히 앞으로 전진할 것이기 때문임.
갈릴레오조차 앞에 펼쳐져 있는 무한성과 대결하지 못했음.
갈릴레오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운동은 관성 운동이며, 상승도 하강도 하지 않은 지구 중심으로부터의 등거리 운동, 즉 원운동이었음.
지구는 이미 우주의 중심은 아니지만 여전히 운동의 중심이기는 했음.
[82]
갈릴레오는 이 원을 타파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음.
낙체의 법칙에는 투사체의 포물선 궤도를 포함했으며, 타원 궤도를 논한 케플러의 <새로운 천문학>도 가지고 있었음.
타원 궤도에서 행성을 떠받치는 물리적 힘은 투사체의 포물선을 만들어내는 힘과 동일한 것이며, 그 어느 것이든 원추 곡선임.
그러나 갈릴레오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
왜냐하면 갈릴레오가 원했던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승리지, 혼돈이 아니었기 때문임.
중력이 없다면 직선적인 관성을 가진 물체는 일직선으로 무한히 날아갈 것임.
갈릴레오가 원을 포기했다면, 그리고 케플러의 업적을 생각했다면, 갈릴레오는 관성을 직선상으로 보았을지도 모르며 천체와 지구를 중력으로 연결했을지도 모름.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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