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1

지젝 칼럼의 존재론적 모순



<한겨레>에 실린 지젝의 칼럼 “탈레반의 ‘순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를 읽어보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아서 세 번 읽었는데 그래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문단별로 요약해보았다. 내가 요약을 잘못했을 수도 있다.

- 문단(1):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고, 서구 언론은 그에 대한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 문단(2): 서구 언론은 탈레반이 자신의 신념에 헌신하는 참여하는 주체의 위치에 서 있음을 고려하지 못한다.

- 문단(3): 푸코는 특수한 관점에 서서 싸우고자 하는 이들만이 역사의 진리를 말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 가능성을 이슬람 혁명에서 찾고자 했다.

- 문단(4): 주체 위치에 서는 것을 근대적 개인주의에 도달하지 못한 전근대적이고 원시적인 사회의 징후로 폄하하거나 파시스트적 퇴행으로 비난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

- 문단(5): 루카치 죄르지는 마르크스주의가 보편적 진리라면 그것은 특수한 주체 위치에서만 접근할 수 있는 바로 그 당파성 ‘때문에’ 보편적 진리일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푸코가 이란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 문단(6):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이들은, 목숨을 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보편적 헌신을 그저 의심스럽고도 비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문단(7):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공동의 참여에 헌신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만들려고 했으나,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승리하면서 공동의 참여에 헌신하고자 하는 정신도 억압되었고, 그러한 정신이 지금 종교적 근본주의의 탈을 뒤집어쓰고 귀환하고 있다.

- 문단(8): 탈레반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대응은, 자신의 쾌락에만 집중하는 개인주의적 ‘자기 배려’도 아니고 전문가들의 객관적 지식도 아니고, 우리 모두의 헌신적인 공동의 참여다.

문단별로 요약해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럴 때는 독해력에 의지하지 말고 글이 풍기는 기운에 의존해서 글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대충 기운을 느껴보자면, 지젝은 탈레반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헌신적인 공동 참여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하나마나한 소리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왜 <한겨레>는 지젝에게 원고료를 주어가며, 그리고 번역가까지 동원하며, 읽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세 번 이상 읽어도 하나마나한 소리 이상의 메시지는 얻을 수 없는 칼럼을 지면에 싣는가? 아마도 같은 지면을 한국인 필자에게 맡겼을 때보다 비용이 더 들었을 것인데도 왜 그랬는가? 한국에 지젝 팬들이 많아서?

한 문단씩 뜯어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일단, 문단(2)를 보자.


하지만 서구 언론이 언급하기를 애써 피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탈레반이 자살적인 행위를 행해서라도 기꺼이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탈레반을 순교를 통해 천국에 들어가려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로 보아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는 그들이 자신의 신념에 헌신하는 참여하는 주체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는 지점을 고려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지닌(이 경우 신념이 지닌) 물질적 힘을 설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신념의 힘은 단순히 강한 확신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을 지닌 이가 자신의 믿음에 직접 존재론적으로 헌신하고 있음에 기반한다. 우리는 그저 이런저런 믿음을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 그 자체다.


“이데올로기가 지닌 물질적 힘”은 무엇인가? 혹시 어떤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실행능력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탈레반이 믿는 바를 행하고 있음을 “믿음을 지닌 이가 자신의 믿음에 직접 존재론적으로 헌신”한다고 표현한 것인가? 그런데 탈레반이 “자신의 신념에 헌신하는 참여하는 주체의 위치”에 있는지 아닌지를 지젝은 어떻게 알지?

문단(3)에는 “미셸 푸코가 1970년대 말, 이란 이슬람 혁명을 지지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고 해놓고는 어떤 맥락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 중 상당수는 푸코와 이란 혁명의 이름만 겨우 알거나 이름조차 모를 텐데, 그러든 말든 지젝은 그냥 질러버린다. 이게 논문도 아니고 신문 칼럼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논문도 이런 식으로는 쓰지 않는다. 아무리 학계 사람들이 다 아는 상식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정보는 전달한다. 그런데 지젝은 그냥 대충 질러버리고 아무런 부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문단(5)에서는 루카치 죄르지라고, 프로 빨갱이나 알까 말까한 사람을 언급하며 당파성 이야기를 하지만, 왜 당파성 덕분에 보편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죄르지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그렇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니고 자명한 것도 아닌데도 던져놓고 만다.

지젝은 앞서 던져놓은 것들을 수습하지도 않고 문단(6)에서 서구 담론의 실증주의적 관념을 언급한다.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이들은, 목숨을 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보편적 헌신을 그저 의심스럽고도 비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쟁점이기는 한가? 탈레반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보편적 헌신을 해서 서구 사람들이 그들을 의심스럽게 보는 것이 아니라, 반-인권・반-문명적 행태를 해서 탈레반을 비난하는 것 아닌가? 내가 서구 사회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지만, 아무리 서구 사회에 개인주의가 팽배하다고 하더라도, 나치에 맞서느라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보편적 헌신을 한 레지스탕스를 이상하게 볼 것 같지는 않다. 아닌가?

문단(7)에서는 유럽에서 공동의 참여에 헌신하고자 하는 정신(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억압과 중동에서 종교적 근본주의의 탈을 뒤집어쓰고 귀환하고 있는 공동의 참여에 헌신하고자 하는 정신(이슬람 근본주의)를 대비한다. 그런데 각 대상은 수많은 측면을 가지기 때문에 모든 대상들의 비슷한 측면을 찾으려고만 한다면 어떻게든 찾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 문단(8)에서는 우리 모두의 헌신적인 공동의 참여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그러니까 지젝의 글이 풍기는 기운을 내가 제대로 느꼈다면, 문단(2)에서 별 것도 아닌 소리나 하면서 심오한 듯 보이려고 “이데올로기가 지닌 물질적 힘” 같은 소리나 하고, 문단(3)과 문단(5)에서는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미셸 푸코나 루카치 죄르지나 들먹거리며, 원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문단(6)에서 보편적 헌신 같은 허구적인 설정을 하며 한 번 꺾고, 문단(7)에서 무관한 두 대상(전통적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을 마치 대단한 공통점이라도 가진 것처럼 비교한 뒤, 문단(8)에서 누구라도 할 수 있고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연한 소리를 결론이랍시고 제시한 것이다. 물론, 내가 지젝의 글을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비판할 점은 여전히 남는다. 내가 아무리 멍청해도 나의 문해력이 평균 문해력보다는 약간 높을 것 같은데, 이런 것을 신문 칼럼이라고 실어놓으면, 독자들보고 읽으라는 것인가, 말라는 것인가?

지젝의 칼럼에는 읽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말고도 또 다른 결점이 있다. 지젝의 칼럼은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과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주제로 하면서도, 그와 관련된 아무런 유효한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다는 것과 푸코와 죄르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간략한 정보만 언급했을 뿐이다. 제공한 정보가 없으니 당연히 유효한 분석도 없다. 유효한 분석이 없으니 유의미한 처방도 없다. 그렇다고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것도 같지도 않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남는가? 독자들의 심리적인 변화 또는 심리적인 동요?

해당 칼럼에서 지젝은 근대 서구 담론의 실증주의적 관념이 한편으로는 전문가들의 ‘객관적 지식’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작은 쾌락만을 살피는 개인들의 ‘자기 배려’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내가 글이 풍기는 기운을 제대로 느꼈다면, 지젝의 칼럼이야말로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지젝이 정말 뛰어난 내용을 썼는데도 전문가만이 알아볼 수 있게끔 글을 쓴 것이라면 “전문가들의 ‘객관적 지식’”만을 고려한 것이며, 지젝이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을 가지고 감수성 독특한 사람들이나 좋아하게 써놓은 것에 불과하다면 “자신의 작은 쾌락만을 살피는 개인들의 ‘자기 배려’”만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지젝의 칼럼은,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비판하면서도 철저하게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인 모순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지젝 칼럼의 존재론적 모순’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 링크: [한겨레] 탈레반의 ‘순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 슬라보이 지제크

( 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8590.html )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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