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할지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프로그램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심심하면 일본 욕을 한다는 점이다. 일제시대 때 일본놈들이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설명하는 것이 방송의 주된 내용인 프로그램도 있다. 물론,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일은 기억해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어서 모두가 다 아는 내용을 방송 형식만 바꾸어가면서 되풀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내가 서른여섯 살을 먹도록 레퍼토리가 바뀌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만 바뀌고 프로그램만 바뀌었을 뿐이다. 사례라도 다양해져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이것이 어떤 것과 비슷하냐면, <개그콘서트>에서 관객들의 박수와 호응을 받으려고 정치인들 욕하는 것과 비슷하다. 개그라고 짜놓았지만 웃기지는 않고 그래도 관객의 호응은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박수와 호응을 얻어내는 손쉬운 방법은 정치인을 욕하는 것이다. 웃기지도 않고 내용도 없고 시사점도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박수는 쳐준다. 박수 받으려고 일본놈 욕이나 하는 무의미한 방송을 반복한다는 점에서는 유사-교양프로그램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 애매한 프로그램들에서 일제가 조선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파괴한 것을 다루는 것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사람들은 일본이 저지른 파괴 행위에 그렇게들 분개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마치 대단한 문화 민족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문화재나 유적지 파괴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라면 한국인이 저지른 문화재나 유적지 파괴에도 가슴 아파할 것이다. 일제시대는 35년이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는 75년이 지났으니 어찌 보면 일본인들이 저지른 파괴보다는 한국인들이 저지른 파괴가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한국인들이 저지른 문화재나 유적지 파괴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긴 왜 그렇겠는가. 애초에 문화 민족이 아니니까 그런 것이다.
서울 송파구에 석촌동(石村洞)이 있다. 왜 동네 이름이 석촌동인가? 조선시대에 그곳에 채석장이 있었나? 아니다. 그 동네에 적석총이 많았기 때문이다. 적석총이라고 하면 길림성 집안 지역에나 있을 것 같지만, 석촌동에도 적석총이 많이 있었다. 고구려 왕족이나 백제 왕족이나 조상이 같으니 무덤을 만드는 방식도 비슷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지금은 적석총이 몇 개 없는가? 악독한 일본놈들이 다 없앤 건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이 없앴다. 집 짓는다고 없애고, 도로 뚫는다고 없애고, 강남 개발한다고 없애고, 88올림픽 준비한다고 없앴다. 다 없어질 것인데 역사학자들이 죽네 사네 하며 고생해서 그나마 몇 개 남은 것이다.
방송에는 이런 내용이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누가 이런 내용을 좋아하겠는가? 우리는 문화 민족이고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고 우리 조상들은 대단한 사람들이고, 우리가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외부에서 나쁜 놈들이 와서 망쳐놓았을 뿐이라고, 우리의 문제는 그 놈들이 저질러놓은 일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모든 문제의 근원을 외부로 돌려야 잠깐 화가 나더라도 마음도 편하고 속도 편하고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석촌동은 방송국에서 멀지도 않은데 굳이 멀리 지방까지 가서 이건 일본놈들이 훔쳐갔고 이건 일본놈들이 없앴다고 하는 방송을 만드는 데는 그러한 공중보건적 고려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1970-80년대 한국은 후진국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치자. 지금은 나은가? 강원도 춘천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1400여 기가 확인되든 말든 <레고랜드>라는 테마파크를 짓고 있다. 유구한 역사가 그렇게도 자랑스럽지만 그런 유구한 역사를 뒷받침할 유적지는 지역 개발에 방해나 되는 걸림돌이다. 걸림돌이나 고인돌이나 어차피 돌덩이지 뭐가 중요하겠는가. 하긴, 외국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싸이나 강남스타일을 아는지를 물어보지 한국의 청동기 유적을 아느냐고 묻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일제시대에 일본놈들이 한반도에 있는 유물을 도굴해갔다고 한다. 도굴은 정말 나쁜 짓이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들의 소행인가, 조선총독부 등에서 시킨 조직적인 범죄인가? 방송에서는 분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석굴암이 하도 눈부시게 찬란해서 일본놈들이 석굴암을 망치려고 일부러 시멘트로 싸발랐다고 하는 방송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방송을 만든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 때 ‘복원’했던 광화문이 시멘트로 지은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던 것인가? 해방 이후의 대규모 유적 파괴는 개인들이 소소하게 저질렀던 도굴과는 급이 다르다. 정부 차원에서 저질렀거나 방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이 안 되어서? 이승만이 친일 부역자들을 채용하고 박정희 등이 만주국 출신이고 한국 사회의 주류가 친일파의 후손이어서? 청동기 유적지를 깔아뭉개고 짓고 있는 <레고랜드>는 민주당 최문순 지사의 역점 사업이다.
방송에서 일본 욕을 열 번 할 때마다 그와 관련된 한국의 상황을 한 번씩만 다루었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일본 욕 열 번 할 때마다 한국 한 번 되돌아보기 운동> 같은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꼭 역사도 모르는 놈들이 그런 소리를 한다.
* 링크(1): [동아일보] 테마파크에 묻히는 한국의 스톤헨지… ‘문화재 참사’ 위기
( 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90727/96718661/1 )
* 링크(2): [연합뉴스] 삐걱대던 춘천 레고랜드 공사 순항…“내년 7월 개장 문제없다”
( www.yna.co.kr/view/AKR20200521116500062 )
* 링크(3): 춘천 중도 레고랜드에 독일 고고학자도 뿔났다!
( www.youtube.com/watch?v=eB9YyKLvwa4 )
(2020.08.24.)
ㄹㅇ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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