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iccolò Guicciardini (2009), Isaac Newton on Mathematical Certainty and Method (Cambridge, Mass: The MIT Press), pp. 331-337. ]
뉴튼이 1664-1666년에 유율법을 형식화했으나 발표를 주저한 이유는 무한급수와 무한소 개념 때문에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670년대 뉴튼은 새로운 광학 이론의 타당성을 두고 왕립 학회(Royal Society)의 자연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이 논쟁은 자연철학에서 수학의 역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왕립 학회에서는 베이컨 식 경험주의가 유행했는데, 뉴튼은 기하학적 철학을 통하여 베이컨 식 경험주의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1672년 라이프니츠는 외교상의 임무로 파리에 도착했다. 그 당시 라이프니츠는 발전된 수학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데 라이프니츠의 맞상대인 호이겐스(Huygens)가 이 점을 일깨워주었다. 이후 라이프니츠가 도달한 결과는 뉴튼과 다른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동시에 뉴튼의 것과 동등한 것이었다. 라이프니츠가 뉴튼의 수학 기호에 관심을 보였으나 단순히 수학 기호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할 수 없는 것은 (i) 첫째, 수학 기호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연구는 폭넓은 철학적 의제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ii) 1675년부터 미적분의 근본 문제, 즉 연속체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올덴부르크는 라이프니츠와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서신을 주고받았고 왕립 학회의 비서인 콜린스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수학적 성과를 라이프니츠에게 알려주었다. 라이프니츠는 파리에서 하노버를 가는 도중인 1676년 10월에 런던을 방문했고 1677년 미적분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하여 뉴튼에게 답변했다.
뉴튼은 『프린키피아』의 주석에서 라이프니츠의 발견을 언급했다. 이는 유럽 수학에서 라이프니츠의 위치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보조명제2에 대한 주석(Scholium to Lemma 2)에서 뉴튼은 라이프니츠가 독립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얻었음을 공적으로 인정했다. 이 주석은 『프린키피아』 3판(1726)에서 라이프니츠에게 비우호적으로 수정되었고 이에 따라 큰 논쟁이 벌어졌다.
뉴튼은 동등한 방법(equivalent method)이 영국에서 발전했다고 선언했지만, 미적분이 발전하고 확장된 것은 대륙이었다. 17세기 후반에 라이프니츠와 야코프 베르누이(Jacob Bernoulli),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형제는 자신들의 작업을 <학술기요>(Acta Eruditorum)에 출판하기 시작했고, 피에르 바리뇽(Pierre Varignon)도 Menoires of the Academie des Sciences에 출판하며 이 무리에 끼어들었다. 이들의 작업은 미적분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대륙의 수학 수준이 영국보다 우위에 있음을 알았다. 존 크레이그(John Craig)와 데이비드 그레고리(David Gregory) 같은 영국 수학자는 새로운 미적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학술기요>에 문의하기도 했다.
1690년대 월리스(Wallis)는 뉴튼에게 “유율법 개념”이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라는 이름으로” 대륙에서 유통되니 출판하라고 제안했고 뉴튼은 이 제안을 계속 거절했다. 그러자 월리스는 뉴튼이 작업한 것의 일부를 구해서 <Algera>(1685), <Opera>(1693-1699)에 포함시켰고 라이프니츠의 지지자인 요한 베르누이는 라이프니츠에게 월리스의 <Opera>에 관련된 불평을했다.
1697년 1월 베르누이는 최단시간강하곡선 문제(brachistochrone problem)를 “세계에서 가장 명석한 수학자”(뉴튼)에게 도전했고 뉴튼은 해결책을 2월에 익명으로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게재했다. 이 논문은 곡선에 대한 기하학적 구성을 포함했지만 유율법적 분석을 포함하지 않았다. 1699년 파티오(Nicolas Fatio de Duillier)는 <Lineae Brevissimi Descensus Investigatio Geometrica>에서 라이프니츠가 뉴튼의 유율법을 표절했다고 비판했다.
18세기 초반이 되자 상황이 악화되었다. 라이프니츠는 <De Quadratura>(1704)를 1705년에 익명으로 출판했고 그 리뷰를 읽자마자 뉴튼은 분노했다. 그 리뷰는 뉴튼의 방법이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보다 열등하거나 시기적으로 늦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1710년에 존 케일(John Keill)은 왕립 학회의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서 라이프니츠가 뉴튼을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라이프니츠는 왕립 학회 회원이었고 그러한 비난에 대해 사과를 요구해야겠다고 느꼈다. 라이프니츠의 편지는 1710/11년 2/4월에 슬로언(Sloane)에 전달되었고 존 케일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왕립 학회의 요청을 받고 뉴튼에게 상담을 받았다. 케일은 사과 대신 뉴튼 식 방법의 “몇몇 견본”이 뉴튼, 콜린스, 올덴부르크에 의해서 라이프니츠에게 전달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1711년 존 케일은 뉴튼의 수학에 대한 소책자를 출판했고 1711년 12월 라이프니츠는 케일 등의 행위를 중단하게 할 것을 왕립 학회에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왕립 학회 위원회 회장인 뉴튼이 은밀히 지도하여 보고서를 제작하게 하고 50일 후에 <Commercium Epistolicum> 완성되었다. 이 보고서의 주장은 뉴튼이 “첫 번째 발명자”이며 라이프니츠의 미분법은 이름과 기호 표기만 빼고 유율법과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라이프니츠가 영국을 방문한 1673년과 1676년 이후에, 그리고 뉴튼의 친구들에게 편지와 기타 자료를 받아본 후에 그리고 1676년 뉴튼에게서 편지와 자료를 받은 후에 유율법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었고 기호를 바꾸어 미적분을 라이프니츠 자신의 발견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뉴튼과 라이프니츠의 논쟁은 라이프니츠가 죽은 뒤에도 이어졌다.
플란캔슈타인(Fleckenstein), 호프만(Hofmann), 홀(Hall), 화이트사이드(Whiteside) 같은 역사학자는 뉴튼과 라이프니츠가 독립적인 경로로 동등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저자는 뉴튼이 왜 다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수학적 도구를 선택했는지에 관심을 가졌는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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