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 피에르는 십자군 원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은자 피에르는 꿈에 베드로가 나타나 성지를 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이슬람과 전쟁을 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전쟁을 선동하기 위해 은자 피에르를 교묘하게 앞세웠다. 1095년 11월, 우르바누스 2세와 은자 피에르는 성스러운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신의 뜻이며 전쟁에서 죽게 되면 천국에 간다는 설교를 했고, 이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가난한 기사들, 농민들, 부랑자들, 어린이, 여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은자 피에르를 따랐다. 은자 피에르는 정식 십자군이 출발하기 전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살렘으로 출발했다. 은자 피에르를 따랐던 이들은 ‘군중 십자군’이라고 불린다. 군중 십자군의 수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군중 십자군들은 상징으로 십자가를 지니고 어깨에는 십자가의 표지를 달았으며 교황이 하사한 하얀 삼베 십자가를 어깨에 걸쳐 메었다. 십자가와 종교적 열정만이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갑자기 모인 사람들이라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고 훈련도 전혀 하지 않았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게다가 군중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예루살렘이 동쪽에 있으니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식량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했던 군중 십자군은 자신들의 귀중품을 팔아서 식수를 구입하고 식량을 공급받다가 이조차 여의치 않자 가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했다. 헝가리 땅을 거치면서는 가는 곳마다 “여기가 예루살렘이냐” 라고 묻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민폐를 끼치며 돌아다니던 군중 십자군은, 헝가리 왕국 기병대의 반격을 받아 태반이 떼죽음을 당했고 베오그라드 보병대에게도 공격받아 상당수가 죽었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은자 피에르를 따라 1096년 7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동로마 황제는 무지하고 무질서한 거지 떼를 수도에 머무르게 할 수 없어 군중 십자군을 곧바로 보스포러스 해협 너머로 보내버렸다. 그렇게 해협을 건넌 군중 십자군들은 니케아에서 셀주크 투르크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1세에게 전멸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렸다. 그 와중에도 은자 피에르는 목숨을 건졌고, 이후 1차 십자군에 합류했다.
1차 십자군 원정이 예루살렘 탈환으로 마무리된 1099년 이후, 피에르가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이 부족할 뿐 아니라 기록마다 은자 피에르의 행적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은자 피에르가 코로나19에 걸렸을 것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 작자 미상, <군중 십자군을 선동하는 은자 피에르>, 73 x 25 cm, 루브르박물관 소장
(202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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