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6

글에는 글쓴이의 무엇이 반영되는가?



이완용이 명필이라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 들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께 들었는지 중학교께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하여간 서예대회에서 상 받는 분이 하신 말씀이다. 이완용은 당대에도 명필로 유명했으나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박물관 수장고에나 그 글씨를 보관하지 전시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전시하지 않으니 인터넷에서 이완용 글씨를 찍은 사진을 보는 것도 어렵다. <연남책빵> 영상에 이완용의 글씨가 잠깐 나온다. 내가 글씨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얼핏 보아도 이완용이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보다 글씨를 잘 썼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쓴 것 같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나는 학부 때 서예 동아리에 있었다. 글씨를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것은 보았다. 잘 쓴 글씨도 있었고 못 쓸 글씨도 있었으나 인품을 알 수 있는 글씨는 없었다. 콘크리트로 만든 광화문을 철거하고 새로 광화문을 지었을 때 현판을 유심히 보았다. 현판 쓴 사람의 인격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고 엉성하게 썼다는 생각만 들었다. 현판 글씨가 못쓴 글씨일 리 없으니 내가 잘 모르는 것이겠거니 하면서 현판을 보았으나 그래도 잘 쓴 글씨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경복궁 중건 할 때 돈이 없어서였는지 지금으로 치면 현장소장 하는 사람의 글씨를 광화문 현판으로 걸었다고 한다. 하여간 현장소장의 인격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글씨를 본다고 그 사람을 어떻게 알겠는가. 글씨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서예 능력뿐이다. 옛날 사람들은 근거도 없이 이상한 것을 많이 믿었다. 오늘날 사람들도 이상한 것을 믿으니 옛날 사람들이 이상한 것 믿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요즈음에는 글씨를 예쁘게 못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글씨까지는 아니더라도 글에는 그 사람의 내면의 꾸며낼 수 없는 무언가가 반영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꽤 있는 모양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식 사고방식인지, 아니면 전 세계적인 사고방식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역사와 전통이 있는 틀린 생각임에는 틀림없다.

글에는 글쓴이의 무엇이 반영되는가? 내가 보기에는 지능, 지식, 경험 정도밖에 없다. 똑똑한 사람이 일부러 멍청해 보이는 글을 쓸 수는 있지만 멍청한 사람이 똑똑한 글을 쓰기는 어렵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 글을 쓸 수 있지만 모르는 것을 아는 척 글을 쓰기는 어렵다. 해본 것은 안 한 척 하는 글을 쓸 수 있지만 안 한 것을 한 척 하는 글을 쓰기는 어렵다. 딱 그만큼이다. 안 착한 사람이 착한 척 하는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쉽다.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이 아니라 그 사람의 표현 능력과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뿐이다. 글에 글쓴이의 삶의 궤적이나 인품 같은 것이 묻어날 것 같다는 그런 오묘하고 신비로운 생각이 들면 조국 교수의 트위터를 보자.

인공지능이 이미 사람이 쓴 시와 구별하기 힘든 시를 쓰고 있는데도 삶이 녹아들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삶이 수용성인지 지용성인지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다만, 삶이 녹아들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므로 인공지능이 쓴 것이 시가 아닌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시를 쓰고 있으니 시에 삶이 녹네 용해되네 하는 것이 애초에 개뻥이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시에 삶이 녹아 있으면 시만 보고도 그 사람의 삶을 유추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시만 보고 그 사람의 삶을 유추할 수 없다면 무슨 근거로 시에 그 사람의 삶이 녹아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또, 그러한 방식의 설명이 어떻게 사이비 설명이 아닐 수 있는가?

* 링크: [연남책빵] 역사 덕후 컬렉터는 어떤 물건을 수집할까? 이완용 붓글씨, 브나로드 운동 포스터, 한글 가사 등

( www.youtube.com/watch?v=55BR5uc1dYU )

(202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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