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몇 년 만에 가요 프로그램을 본 것인지 모르겠다. 남자고 여자고 한 무더기씩 떼로 나와서 20년 전 일본 노래 같은 것을 불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 건 아니고 보다가 채널을 돌렸는데, 보는 동안 죄다 모르는 가수들만 나왔다. 가요 프로그램에 나오는 가수 중에 내가 아는 가수가 없다니. 1위 후보곡 세 곡 중 레드벨벳의 <사이코>와 지코의 <아무 노래>는 아는데 나머지 하나는 곡을 모르는 게 아니라 가수 자체를 몰랐다. 가수 이름이 ‘창모’였다. 내가 아는 구창모 뿐인데, 창모라는 가수가 1위 후보가 될 때까지 나는 그의 존재도 몰랐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좋아하는 가수든 아니든 그래도 누가 누구인지는 알았는데, 이제는 아는 가수가 많지 않다. 그들 중 대부분은 지금 몰라도 상관없고 10년 뒤에 몰라도 상관없겠지만, 어쨌든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친구가 나보고 줄임말 같은 것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잘 모르지만 ‘갑분싸’ 같은 것은 안다, 배우 황정민처럼 “갑분싸가 갑자기 분뇨를 싸지른다의 줄임말 아니냐”고 묻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자만추’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자만추, 어디서 들어보기는 했는데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기억을 못하자 힌트로 용례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아무개 씨, 소개팅 하는 거 어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자만추예요.”
소개팅 제안을 거절하고 자기는 자만추라고 한다니. 하나가 떠올랐다. 자기 만족하는 추한 남자? 확실히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생각나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한참 있다가 자만추가 무슨 말인지 기억났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내가 어디서 듣기는 들었던 것이다.
회사원인 친구는 줄임말의 틀린 사용에 대해 말했다. 어떤 임원이 사장하고 한참 싸우고 나온 다음에 자기가 사장한테 ‘열폭’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열폭? 이게 무슨 말인가? 그 나이 많은 임원은 열폭이 ‘열등감 폭발’이 아니라 ‘열 받아서 폭발’인 줄 알고 그랬던 것이다. 아마도 그 임원은 내 친구가 열폭의 원래 뜻을 가르쳐주기는 전까지 줄임말을 아무 상황에서나 부적절하게 사용하고 다녔을 것이다. 결함 있는 전자제품을 판매한 대리점에 항의하러 다녀와 놓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방금 무슨 무슨 대리점에 가서 열폭하고 왔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
그 나이대 어른들이 줄임말을 그런 식으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 분들이 어쩌다 새로운 말이나 젊은이들이 쓰는 말을 배우면,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 아이처럼 새로 배운 말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쓰며 용법을 익힌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런 분들에게 그런 말을 가르쳐주는 분들도 그 말의 원래 뜻을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원래의 줄임말은 그들만의 새로운 뜻을 가지게 되어 그 분들의 의사소통에서 다른 의미로 통용된다고 한다.
이상한 줄임말 같은 것을 쓰면 세종대왕이 슬퍼하니까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보고 이상한 말 쓰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말을 쓰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아니라 나이든 어른들일지도 모르겠다. 세종대왕이 슬퍼할까봐 그러는 것은 아니다. 우리 엄마 늙었다고, 우리 아빠 늙었다고 주변 사람들이 슬퍼할까봐 그런 것이다.
(202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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