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2

경제학자 어빙 피셔의 불운



피터 갓프리스미스는 『이론과 실재』(Theory and Reality)에서 쿤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X등급인 10장(Chapter X)은 쿤의 위대한 책에서 가장 안 좋은 부분이다. [...] 쿤이 10장을 택시에 두고 내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p. 96) 그런데 경제학자 중에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 바로 어빙 피셔(Irving Fisher)다. <거시경제학>과 <화폐금융론> 교과서에 나오는 그 어핑 피셔다.

1905년 뉴욕 그랜드센트럴 역에 도착한 피셔는, 누군가와 통화하기 위해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피셔는 부스 문을 닫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다리 사이에 놓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뒤 피셔의 가방은 사라졌다. 피셔가 입은 정장만큼이나 서류가방도 고급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가방이 아니었다. 그 가방에는 거의 완성한 원고가 있었다.

경제학과를 다니다 형편이 어려워 나쁜 길로 빠진 가방 도둑이 피셔의 원고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뉘우치며 원고를 돌려주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영화나 소설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다. 결국 피셔의 원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피셔는 책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한 장(chapter)을 완성할 때마다 복사본을 만들었다. 그렇게 1년 만인 1906년 책을 다시 완성하여 출판했다. 『자본과 소득의 본성』(The Nature of Capital and Income)은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사실, 어빙 피셔의 불운은 한두 차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학 진학 직전인 1884년에 피셔의 아버지가 갑자기 결핵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피셔가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다. 1898년에는 교수로 임용되자마자 결핵에 걸려 몇 년 간 정상적인 생활을 못했다. 겨우 건강을 되찾아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는데 1904년 예일대 북쪽에 있던 집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그리고 1년 뒤인 1905년 원고를 도둑맞았다.

불운을 극복할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피셔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운을 이겨낼 정도로 재능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피셔는 예일대에서 학부를 다닐 때 장학금과 과외 교습으로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1888년에 정상적으로 졸업했다.

피셔의 학부 전공은 수학이었지만 사회학에도 관심이 있어서 당시 저명한 사회학자인 윌리엄 섬너(William G. Sumner)의 사회학 과목을 다섯 과목이나 들었다. 사회다윈주의자인 섬너는 사회를 유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모든 이해관계가 정립되어 사회가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작용-반작용을 거듭하며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신-고전주의 경제 이론의 수학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싶었던 섬너는 수학교수에게 과외 교습을 받았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고 한다. 1888년 가을, 섬너는 수학과 졸업과제를 제출하려고 학교에 온 피셔에게 수리경제학을 공부할 것을 권유했고, 피셔는 경제학자가 되기로 했다. 피셔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균형 이론을 정교화했는데 이 때 ‘이상적 시장 모형’이라고 이름 붙인 모형을 개발했다. 그렇게 사무엘슨이 경제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박사 논문이라고 평한 논문이 나오게 되었다. 수학과 경제학을 같이 공부한 피셔는 동시대 경제학자들이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1893년 박사 학위 받은 피셔는 곧바로 결혼했다. 피셔의 고향은 로드아일랜드인데, 장인은 로드아일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가였다. 부유한 장인은 1년 간 딸과 사위를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보내고 그 사이에 예일대 북쪽에 딸과 사위가 살 저택을 지었다. 피셔는 1년 간 유럽을 여행하면서 신-고전파 경제학 창시자들을 두루 만나고 파리에서 푸앵카레의 확률 이론 수업도 들었다. 1898년에 결핵에 걸려 6년 간 휴양해야 했지만, 건강을 회복한 뒤 위생학 교과서를 공동 집필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1920년대가 되자 피셔의 모든 일이 잘 풀렸고 불운은 끝난 듯 보였다. 피셔의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는 적었지만, 피셔를 존중하는 경제학자들은 많았다. 학문적 성공 뿐만 아니라 여러 대외 활동도 활발히 했다. 피셔는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생각을 펼쳤고, 언론에서는 피셔를 경제/정치/보건 전문가로 소개했다.

피셔는 재정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피셔는 자기가 연구한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색인카드를 고안했고, 1913년에는 색인카드를 제작-판매할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1925년에 카덱스랜드에 매각하면서 피셔는 카덱스랜드의 주식과 일정 가격에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카덱스랜드의 이사로 취임한 피셔는 돈을 빌려서 카덱스랜드의 주식을 더 샀고 이 투자는 크게 성공했다. 수십 년 간 처가에 기대어 살던 피셔가 드디어 집에 돈을 벌어다주는 사위가 되었다. 당시 피셔의 순 자산이 1천만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2008년 달러 가치 기준으로 1억 2800만 달러가 된다. 피셔는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전쟁, 질병, 사회퇴폐, 통화불안을 예방하는 재단을 설립하려고 했다.

호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호황이 계속될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저 뱁슨과 윌리엄 해밀튼은 1926년에 약세장을 전망했다. 1926년은 강세장이었다. 해밀튼은 1927년과 1928년 강세장 전망으로 돌아섰지만 뱁슨은 계속 약세장 전망했다. 3년 간 계속 주가가 상승해서 뱁슨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피셔도 상승장이 지속될 것으로 믿었다. 1928년 12월 <뉴욕헤럴드트리뷴> 일요판에는 피셔의 증시 전망이 실렸다. 피셔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판단이 거래자들의 집단 지성을 능가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 [...] 투자 종목이 적을수록 위험하고 투자 종목이 많을수록 안전하다. 충분히 다양하게 분산투자하면 안전하게 수익을 낼 수 있다.” 분산과 리스크의 관계를 공식으로 설명한 사람은 피셔가 처음이었다.

1929년 9월, 뱁슨은 자기가 주최한 컨퍼런스에서 조만간 시장이 붕괴할 것이며 그 규모가 심각할 수 있으니 지금은 빚을 갚고 투자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절절하게 호소했다. 같은 날 피셔는 ‘증시가 침체될 수는 있지만 폭락할 가능성은 없다’는 내용의 반박문을 <뉴욕타임스>에 보냈다. 10월 15일 피셔는 뉴욕 구매업자협회 모임에서 “주가는 영원히 하락하지 않을 고지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주 뒤,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조정장일 뿐이라고 믿은 피셔는 1929년 12월에도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 절망과 공포가 가득한 이 시점에도 다우지수는 1928년 2월 수준이다. 현재 주가는 1923년에 돌파한 고점보다도 더 위에 있다. 시장이 최악의 공포에 빠진 때도 이 저점이 깨진 적은 없다.” 그러나 1930년과 1931년에 이어진 사상 최악의 약세장에서 저점이 뚫렸다.

피셔는 분산 투자를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은 래밍턴랜드와 몇몇 회사에 집중 투자했다. 게다가 래밍턴랜드의 주가가 58달러에서 1달러가 될 때까지 팔지 않았다. 처제에게 돈을 빌려 파산을 겨우 면했지만 1930년과 1931년에 계속 주가가 하락해서 처제도 타격을 입었다. 결국 예일대 북쪽에 있던 자택도 자기와 부인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조건으로 예일대에 팔 수밖에 없었다.

로저 뱁슨은 재산 손실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공황을 예측한 인물로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이후에 혁명이니 핵공격이니 이상한 소리를 해서 외면 받았다. 피셔는 대공황을 예측하지 못하고 거의 전 재산을 잃어 비웃음을 받았지만, 1930년대부터 경제와 금융 시장을 수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피셔의 접근법이 다시 서서히 지지받기 시작했고, 이후 피셔의 업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불운은 개인의 재산이나 건강이나 명성을 앗아갈 수는 있지만 연구 업적의 생명력까지 앗아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피셔의 생애는 보여준다.

* 참고 문헌

저스틴 폭스,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 윤태경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0).

* 뱀발: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의 원제는 <The Myth of the Rational Market>이다. “합리적 시장이라는 신화” 정도로 책 제목을 번역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책 제목을 굳이 그렇게 번역한 데는, 아마도 출판사가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와 달리,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에서 소개한 경제학자 중 상당수는 아직도 살아 있다.

(20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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