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교수의 딸이 SCI급 논문의 제1저자인 것이 법적으로도 문제없고 도덕적으로도 문제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공계 학부생을 통해 이공계 대학원생의 이야기를 건너 건너로 들은 것이다. 그 대학원생은 해당 논문을 직접 읽었다고 하는데 그의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해당 학술지가 SCI급이기는 하지만 해당 분과에서 보면 상당히 낮은 학술지.
(2) 실험 방식도 정형화된 것이어서 연구실에서 실험 프로토콜만 가지고 있었다면 고등학생이 실험해도 금방 데이터 뽑을 수 있는 수준.
(3) 과학 쪽에서는 국내 학술지를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음.
(4) 국내 학술지의 경우 SCI급이라도 피어 리뷰를 엄격하지 않게 하지 않아서 통과하기가 어렵지 않음.
(6) 학부 친구들 중, 특히 특목고 출신들은 고등학교 때 간단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논문에 저자로 이름이 올라간 경우가 꽤 있었음. 이는 그 친구들 부모님이 엄청난 특권층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특목고생들에게는 드물지 않은 일.
(7) 그러나 사람들에게 ‘논문’에 대한 환상이 있고 ‘SCI급’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도 있어서 해명을 아무리 잘 해도 안 믿었을 것 같기는 함.
그 대학원생의 분석이 맞다면, 조국 교수의 딸이 논문의 제1저자인 것에는 법적・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정유라 때처럼 한 사람을 위해 없던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므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능력 있는 집안에서 있는 제도를 활용해서 자식을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받게 한 것이므로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학교나 독서실에서 수능 문제만 푸는 것보다 이렇게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에 참여하는 것이 개인의 발달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왜 찜찜한 기분이 들었을까.
조국 교수의 딸이 SCI급 논문의 제1저자라는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냥 덤덤했다. 그냥 석연치 않은 일이 있나보다 싶었다. 조국 교수 딸이 SCI급 논문의 제1저자라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그때부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짐작도 못한 세계가 있구나, 좋은 집에서 태어난 재능 있는 자식들은 저렇게 사는구나, 그런데도 법적・도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부당하게 특혜를 취하는 사람에게는 욕이라도 하겠는데 정당하게 특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욕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박사과정까지 온 나도 이렇게 놀란 마음이 드는데, 논문을 쓰기는커녕 읽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조국 교수 딸의 논문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겠는가.
조국 교수와 관련된 촛불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런 놀란 마음으로 나왔을 것이다. 시위대 중에는 일베충도 있을 것이고, 박근혜가 무죄라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유한국당 지지자들도 있을 것이고, 대학에서 청소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면 내가 내야 할 등록금이 오른다면서 청소노동자들의 시위를 방해한 개돼지 같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놀란 마음으로 뛰쳐나온 순진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법적으로 문제없는 일 가지고 유난 떨지 말고 꺼지라고 하면 순순히 꺼질까? 아니다. 일단은, 마음이 진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위대를 싸잡아서 매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방패막이로 쓸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을 방패막이로 쓰면서 시위대 밖에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며 여론을 왜곡할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는데, 연로한 진보인사들은 눈치도 없이 아무 말이나 해서 여론을 악화시킨다. 어떤 역사학자는 지금 시위하는 대학생 중에 자기소개서를 자기 손으로 쓴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했다. 시위대 중에 농어촌특별전형으로 대학에 온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언론인은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을 두고 “수꼴”이라고 했다. 결국 그 언론인은 자신의 발언을 사과했다. 어떤 남성 소설가는 이명박-박근혜 시절 찍소리도 못하던 성인군자들이 입에 거품 물고 송곳니를 드러낸다고 비웃었다. 지금 대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이명박-박근혜 때 중고등학생이었다. 어떤 여성 소설가는 조국은 문재인 대통령이 믿는 사람이니까 믿어야 한다고 했다. 이건 그냥 개소리다. 어떤 국회의원은 조국 교수의 딸이 보편적 기회를 누린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거리에 나온 것은 그런 기회를 누리지 못해서다. 어떤 교육감은 외국에서는 어려서부터 다들 현장실습하고 에세이를 쓴다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대학에서도 웬만큼 좋은 학교가 아니고서는 졸업할 때까지 제대로 된 에세이를 쓰기 어렵다.
이 판국에 진보인사들이 할 말이 있겠는가. 사회가 이렇게 된 책임이 기성세대에게 있다면서 미안하다고 하고, 그래도 시위할 때 “자유한국당은 오판하지 말라” 같은 구호 한 마디만 해달라고 부탁하고 달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조롱하고, 어떤 사람들은 너희가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가르치려고 든다. 분위기 파악을 못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감이 없나 모르겠다.
(201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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