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3

[군사사] 이정하 (2013), “K. E. 보로쉴로프와 적군(赤軍) 기병대: 기술결정론(Technical Determinism)에 대한 반론” 요약 정리

   
[ 『서양사연구』 49권, 123-154쪽. ]
  
  
  I. 서론
  II. 러시아 제국군 기병대와 적군 기병대
    1. 러시아 제국군 기병대: 미국남북전쟁의 영향
    2. 러시아내전: 전략기병의 등장
  III. 적군 기병대와 기계화
    1. 기병 조직개편과 기술수용
    2. 기병대와 기갑교리와의 관계
  IV. 보로쉴로프, 적군 기병대 그리고 군부숙청
  V. 결론
  
  
  I. 서론

■ 독소전 패배에 대한 기존 분석 [123-126쪽]
- 속사-장거리 화기가 도입된 이후 기병의 군사적 효용성에 의구심.
• 예) 전차의 등장과 항공기의 군사적 이용 등
- 많은 역사가들은 1차 대전 이후에도 유럽 군대에 존재한 기병대는, 군사기술상의 변화를 두려워한 기병 지휘관들의 보수성과 군사적 무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함.
• 군부에서 고위직을 차지한 기병 출신 지휘관들이 새로운 군사기술 도입에 반대하여 2차 대전 초반 폴란드와 프랑스의 충격적인 패배를 겪었다는 것.
- 이는 독소전 초반 재앙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던 적군에도 적용됨.
• 주코프(Georgii K. Zhukov)나 로코솝스키(Konstantin K. Rokossovskii) 등 독소전에서 활약한 지휘관들이 기병대 출신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적군 기병을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인 집단으로 묘사함.
• 독소전 초기에 패배한 주된 원인을 보로쉴로프(Kliment Efremovich Voroshilov)를 중심으로 한 기병 지휘관 집단의 군사적 무능과 기계화의 지연으로 돌림.
- 1930년대 말에 발생한 군부숙청과 관련
• 기병출신 고위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조직 기반인 기병 병과를 보호할 목적으로 기계화를 주도했던 투하쳅스키(M. N. Tukhachevskii) 등의 개혁적 지휘관 집단을 제거한 사건이 군부 숙청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짐.
• 숙청의 주요 장본인은 보로쉴로프이고, 스탈린의 정치적 지원이 있었다는 것.
• 스탈린은 러시아 내전 동안 제1기병군에서 정치위원으로 보로쉴로프와 함께 근무.

■ 보로쉴로프의 이력 [126쪽]
- 러시아 내전 이전에는 군사 경험이 전무
- 남부 전선에서 스탈린과 부됸니(S. M. Budennyi) 등과 함께 내전 당시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던 제1기병군을 조직하면서 군사 경험을 쌓음.
- 1925년 국방 인민위원장인 프룬제(M. V. Frunze)의 사망 이후, 적군의 수장이 됨.
- 핀란드와의 겨울전쟁(Zimmiaia voina, 1939~1940)에서의 지휘상 실책을 이유로 국방 인민위원장직에서 사임하지만,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적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함.
-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보로쉴로프는 독소전의 모든 군사적 실책의 원흉으로 묘사됨.

■ 논문의 목적 [126-127쪽]
- 보로쉴로프와 적군 기병대와 관련된 몇몇 잘못된 편견을 논박하는 것.
- 19세기 중후반에 이미 러시아 제국군 기병은 미국 남북전쟁의 군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기병전술에 새롭게 등장한 군사기술을 효율적으로 결합하고자 함.
- 이러한 시도는 소련과 적군에서도 계속됨.
• 적군은 새로운 군사기술과 이로 인한 새로운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여, 기병의 전투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을 이어갔고,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보로쉴로프였다는 것.
• 1930년대에 등장한 기갑 교리와 기갑 부대가 기병의 종말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여타 국가들의 경우들과는 달리, 적군에서 기갑부대와 기병대의 공조를 강조하는 독특한 기갑 교리가 발전되었다는 것.


  II. 러시아 제국군 기병대와 적군 기병대

    1. 러시아 제국군 기병대 : 미국남북전쟁의 영향

■ [127-128쪽]
- 미국 남북전쟁은 기병이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가진 새로운 성격의 조직으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줌.
- 혁신(1): 남군과 북군 양측 기병은 기존의 기마전술과 화기를 사용하는 하마전술을 결합
• 강력한 화력으로 기병 기동을 무력화시켰던 보병 부대에 대해서도 효율적인 작전이 가능토록 함.
- 혁신(2): 대규모 기병을 이용한 장거리 전략 습격
• 화약무기의 등장 이후 기병대가 단거리 정찰 등의 제한된 임무만을 수행
• 남북전쟁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전략적 국면에서 독자적으로 적 후방에 대한 장거리 습격을 감행.
• 주요 공격 목표: 철도와 보급창 등의 적 후방의 중요 거점과 전쟁수행에 필요한 전략적 목표들
• 예) 북군의 윌슨은 7개 기병사단(총 13,000명)을 이끌고 독자적인 장거리 기동. 남군의 주요 시설물과 자원을 파괴하여 전쟁수행능력에 큰 타격을 입힘.(1865년 3-4월)

■ 다른 국가들의 반응 [128쪽]
- 유럽 군사이론가들의 반응
• 새로운 기병 운용은 당시 유럽의 군사이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함.
• 남북전쟁은 유럽에 비해 광대한 선장에서 유럽 군대보다 훈련 정도가 뒤떨어지는 병력이 수행한 매우 특이한 전쟁일 뿐.
•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수목이 많은 유럽의 지형에서 실행불가능 
- 러시아 장교단
• 미국과 러시아의 지형적 유사성 등의 이유로 남북전쟁의 새로운 군사적 양상에 흥미
• 러시아 제국군 기병장교단이 미국 남북전쟁이 보여준 새로운 전술 전략적 가능성과 새로운 전쟁양상에 많은 관심을 보임.
• 예) 니콜라이 수코틴(Nikolai N. Sukhotin)은 장군참모학교 학위논문에서 대규모 기병의 적 후방 주요시설물들에 대한 파괴 작전과 전쟁수행능력의 상관관계에 주목함.
• 니콜라이 수코틴은 이후 기병총감으로 제국군 기병개혁을 주도함.

■ 1882년 용기병 개혁 실시 [129-130쪽]
- 1870년대 초
• 용기병(dragoon)에게만 제한적으로 시행되던 하마전술 훈련이 경기병(hussar)과 창기병(lancer)에게도 도입됨.
- 러시아-터키전쟁(1877~1878) 이후 1882년 “용기병 개혁”(Dragunskaia reforma) 실시
• 기병총감인 수코틴이 주도함.
• 근위 기병과 코사크 기병을 제외한 모든 정규 기병연대를 용기병으로 전환
• 러시아는 용기병만으로 구성된 46개 기병연대를 정규 기병대로 보유
- 전투 장비의 개혁
• 근접전에 대비하여 기병도는 그대로 보급
• 장창 보급은 폐지. 짧은 총신의 베르단 소총(Berdanka)과 총검으로 대체.
- 전술 변화
• 제국군 기병은 화기에 기반하여 기마-하마 통합전술을 구사
• 전술적 임무를 넘어 적의 주요한 전략적 거점의 점령과 파괴를 주 임무로 함.
• 야포, 기관총, 공병부대 등을 기병대에 배속하여 어떠한 종류의 적이나 전술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전략기병의 형태로 변모
  

    2. 러시아내전: 전략기병의 등장

■ 기병의 효율성 [130-131쪽]
- 러시아 내전에서 기병은 적군과 백군 양측 모두에게 가장 효율적인 병과
• 전선의 광대함
•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병력
• 중화기로 무장한 잘 훈련된 보병부대의 부족
- 1차 대전과 러시아 내전 비교
• 1차 대전 당시 전선 1km당 병력 4천-5천 명과 야포 150대가 배치됨.
• 내전이 가장 치열하던 1919년 말에도 적군은 1km당 병력 250명과 야포 2대를 운용.
• 1차 대전의 참호전: 측면이 노출되지 않아 상대방 진지 정면 돌파를 되풀이.
• 러시아 내전: 측면과 후방의 노출이 빈번. 전략기병이 큰 역할.

■ 러시아 내전 기병 전투의 특징(1) [131-132쪽]
- 특징(1): 화기에 기반한 하마전술
- 적군 기병은 화력에 의존하는 전술을 주로 구사함.
• “타찬카(tachanka)” 위에 설치한 重기관총 사격과 적 정면에 대한 포격 그리고 적 후방과 측면에 대한 기마 하마공격
- 백군 기병대는 화기 사용을 꺼리는 보수적인 성향
• “기병도와 기병돌격에 대한 ‘숭배’와 화기에 대한 ‘혐오’는 돈 코사크, 쿠반 코사크 그리고 여타 백군 기병대들의 전형적인 특징”
- 백군에서 활동한 파벨 아르쉬노프(Pavel Arshinov)의 평가
• 적군 기병대는 “이름뿐인 기병대(karalerii tol’ko po nazvaniiu)”일 뿐이며, “기병도를 사용하여 근접전을 할 능력이 없는, 화포나 기관총으로 상대방을 혼란에 빠트린 다음에야 전투를 시작”하는 “나쁜 기병”
• 데니킨(Anton I. Denikin)의 백군 기병대는 “화포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기병도를 뽑아들고 적들에게 돌격하는 [...] 훌륭한 기병대”
  
■ 러시아 내전 기병 전투의 특징(2) [133쪽]
- 특징(2): 대규모 기병운용
• 제1기병군의 창설은 내전 이후 적군의 가장 주요한 군사적 업적으로 평가됨.
• 기병 16,000명, 이를 지원하는 보병부대와 야포, 기관총으로 구성됨.
• 전술-전략적 임무 모두를 수행함.
• 정찰, 돌격, 추격 등 전술적 운용에서 벗어나 화력에 기반한 독자적인 원거리 기동작전, 적의 측면과 후방에 대한 습격, 다른 병과들과의 협동작전을 함.


  III. 적군 기병대와 기계화

■ 기존의 평가 [133-134쪽]
- 보로쉴로프와 보수적인 기병 지휘관들의 보수적인 태도가 적군의 군사발전, 특히 기계화 계획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
• 근거: 숙청의 피해자인 이세르손(G. Isserson)이 스탈린 격하운동 시기에 쓴 글 등.

■ 기존 견해에 대한 반박(1) - 연설문 분석 [134쪽]
- 보로쉴로프가 기병대에 우호적인 발언을 하기는 함.
• 보로쉴로프의 1938년 발언: “다른 국가들의 군대에서 기병대는 [...] 이미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견해는 다르다. 우리는 용맹한 적군 기병대가 여전히 모든 전선에서 중요한 군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적군 내 기계화계획을 대표하던 투하쳅스키와 여러 많은 인물들이 숙청으로 이미 처형된 시점인 1938년에 이러한 발언을 함.
- 그러나 실제로 연설 전문을 살펴보면, 위의 인용이 전체 연설과 전혀 다른 맥락에서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음.
• 적군 창설 20주년을 기념하여 적군 내 모든 병과들에 대한 의례적인 찬양에 불과
• 보로쉴로프는 같은 연설에서 기갑병과의 발전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함.

■ 기존 견해에 대한 반박(2) - 기계화 장비 조달 [134-136쪽]
- 보로쉴로프는 여러 군사 문제와 관련하여 투하쳅스키와 종종 다른 견해를 보임.
- 그러나 두 인물 간 논쟁의 핵심은 기계화 계획의 유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계화 계획을 어떤 식으로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
• 1928년 스탈린과 보로쉴로프는 투하쳅스키가 제시한 기계화계획 초안을 비-현실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
• 기계화 계획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투하쳅스키가 제시한 기계화 계획에 필요한 재원 조달이 당시 소련의 경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 적군의 기계화는 스탈린과 보로쉴로프부터 거의 무제한적인 재정적 지원을 받음.
• 영국군의 기계화 정책은 1차 대전 이후의 군부 예산삭감과 인원감축 조치의 일환
• 소련은 자신들의 기계화 정책에 무한정의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
- 각 군의 기계화의 방향
• 영국, 프랑스, 독일은 전차를 모아 하나의 거대한 기계화 부대로 편성할지, 아니면 전차를 보병부대에 편입하여 보병 공격을 지원하는 보조 역할을 수행하게 할지를 선택함.
• 적군은 기계화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원으로 인해 이 두 선택 모두를 충족
- 사례
• 전차: 100여 대(1928년) → 15,000대(1938년)
• 1938년 소련은 당시 가장 많은 전차를 보유한 국가

■ 사료 [136쪽]
- 적군의 기계화 계획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기존 평가는, 1990년대 문서고 개방 이전까지 소련에서 발간된 회고록이나 근거가 희박한 개별 일화 등에 근거함.
- 소련 붕괴 이후 모스크바 소재 러시아 국립 군사문서고도 개방되고 고급지휘관들이 군사회의에서 논의한 문건이 공개됨.
• 적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1934년까지 혁명군사위원회(Revoliutsionnyi voennyi sovet)에서, 1934년 조직개편 이후부터는 국방인민위원회 부속 국방회의(Sovet oborony)에서 주요한 군사 현안을 논의함.


    1. 기병 조직개편과 기술수용

■ 1920년대 러시아 기병 병과의 변화 [136-137쪽]
- 러시아 내전 이후, 기병 병과 자체의 전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
• 1920년대 적군 기병은 하마전투, 화기사용과 사격훈련, 보병과 포병 심지어 기갑차량과의 합동작전 능력을 요구받음.(당시 기병 군사교범에서도 드러남.)
• 기병대에 배속된 소규모 기관총분대(1914년) → 중대 규모로 증편(1925년)
• 1929년에 시작된 수송수단의 기계화 → 기병부대의 작전 반경이 이전보다 10km 이상 증가
  
■ 보로쉴로프의 평가 [137-138쪽]
- 보로쉴로프는 적군 기병의 타 병과와의 협동성 부족을 지적함.
• 1929년 적군 기병의 전투상황에 관한 논의에서, 러시아내전 이후 7년 동안의 기병훈련 결과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임.
• “여전히 적군 기병대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기병도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말을 타고 돌격이나 하는 것”

■ 부됸니와 투하쳅스키의 보고서 [138-139쪽]
- 부됸니가 보로쉴로프에게 제출한 보고서(1931년 2월)
• 더 넓은 작전반경 확보와 신속한 이동, 독자적인 작전수행, 적의 기계화 부대에 대한 방어문제와 관련한 기병 재조직 계획
• 기존 기병사단을 경기계화 또는 경차량화 사단으로 개편하기 위한 계획을 언급
• 새롭게 만들 사단은 기병연대 4개, 포병연대 1개, 기갑연대 1개로 구성.
• 새로 배치될 기갑연대는 기갑차량 1개, ‘경장갑 전차’(tanketka) 대대, 전차 30대로 이루어진 경전차부대로 구성됨.
• 전차는 기병사단의 보조 병력으로 적을 포위하거나 적의 측면・후방을 공격할 때 기병을 지원하는 역할
- 투하쳅스키의 보고서
• 전차부대를 보병사단뿐만 아니라 기병사단에 배속하여 기병의 전투력을 강화하도록 건의
- 변화
• 러시아 내전 직후, 기병대는 다수의 기병, 소수의 보병부대와 중화기만을 보유.
• 독소전 직전 적군 기병 1개 사단은 총 9,420명. 전차 34대. 장갑차량 18대, 화포 136대를 보유.
  

    2. 기병대와 기갑교리와의 관계

■ 종심전투에서의 기병의 역할 [139-141쪽]
- 보로쉴로프가 적군 수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기병 병력이 크게 증가
• 적군 기병의 규모: 12개 사단(1929년) → 32개 사단(1935년). 약 2.7배 증가.
• 같은 기간 적군 총규모는 두 배 증가
- 이는 투하쳅스키 등이 주장한 기갑교리인 ‘종심전투’(glubokii boi)와 ‘종심작전’(glubokaia operatsiia)의 필요에 의한 것.
• 1920년대 적군 기병대는 화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하마전투와 적 항공기나 기갑무기의 공격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전술역량 강화에 주력
• 1930년대 들어 적군 기병은 종심전투와 종심작전 개념에 따라 기갑장비와 함께 수행하는 합동작전에 집중
- 종심전투는 기갑부대, 보병, 포병, 기병의 밀접한 상호공조를 상정한 개념
• 1단계: 방어선 돌파와 돌파구 형성 단계. 기병이 투입되지 않음.
• 2단계: 종심 작전단계. 이미 획득된 전술적 성공을 전략적으로 발전시키는 단계. 대규모 전차뿐만 아니라 ‘기계화’ 기병(전차와 장갑차량을 보유한 기병부대)의 기동이 중요
- 기병의 역할
• (1) 기갑부대가 만들어놓은 돌파구의 확대와 이를 통한 전술적 성공을 전략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는 것
• (2) 기동력이 떨어지는 보병과 포병으로 구성된 아군 주력이 도착하기 전까지 점령지와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 기갑부대가 획득된 점령지와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은 기갑부대 공격 속도의 ‘모멘텀’(momenty)을 유지하는 데 중요함.
• (3) 점령지와 보급로 유지 임무를 주력부대에게 맡긴 다음에는 빠른 기동력을 이용하여 기갑 부대와 합류한 후 기갑부대의 작전수행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원
• (4) 적의 화력이 약하거나 적의 방비가 약한 주요거점을 발견했을 경우 독자적인 공격을 수행
- 투하쳅스키의 평가: “몇 년 전 우리는 기병의 종말에 관해서 이야기했지만, 현재 기병의 역할은 심대하게 증가하였고, 특히 [적군] 기계화 발전에 있어 기병의 역할은 괄목하다.”
• 1932년 ‘기계화’ 기병군단 2개를 창설할 것을 주창함.

■ [141쪽]
- 적군 기병의 목표: ‘종심작전’의 틀 내에서 기계화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진정한 의미의 ‘전략기병’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 이는 소규모의 전술운용이 아닌 적의 전략적 붕괴에 초점
• 적군이 구상한 기계화는 기병을 전차로 대체하여 장갑차량이 기병의 군사적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화 부대의 설치 및 확대와 함께, 기갑부대와 함께 운용할 ‘기계화 기병’을 만드는 작업

■ [141-142쪽]
- 보로쉴로프의 1933년 연설
• “차량화-기계화 부대가 미래 군대의 요체이며, 모든 병과는 이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가계급의 이론일 뿐이다. [...] 이 이론은 적군에 적절치 못하며, [...] 지구의 6분의 1을 영토로 가진 나라에는 적절치 못하다.”
• “또 다른 극단적인 태도도 존재한다. 차량화-기계화 계획은 헛소리에 불과하며, [...] 좋은 보병, 좋은 화포, 좋은 기관총 부대를 장비한 좋은 기병, 그리고 필요하다면 매우 적은 수의 전차로 적의 차량화-기계화 병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두 생각 모두 우리 국가에 적절치 못하며, 우리의 국방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계화 부대를 보유해야 하며, 모든 현대적인 군대가 강력한 보병부대를 보유하고 있듯이, 기갑 장비로 무장한 기병대도 보유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유해야 하며, 또한 충분히 보유할 능력이 있다.”
  
  
  IV. 보로쉴로프, 적군 기병대 그리고 군부숙청

■ 군부 숙청 시기 기병대 규모 변화 [142-143쪽]
- 기존의 역사가들은 보로쉴로프를 평가할 때 군부숙청(1936-1938년)에서 그가 행한 역할을 고려함.
- 보로쉴로프가 투하쳅스키 등의 반-혁명 혐의를 실제로 믿었는지, 자신의 군부 내 영향력 유지하고 기병의 조직적 안전을 위해 숙청을 주도했는지는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없음.
- 숙청 시기가 적군 기병대의 감축과 해체 그리고 해체된 기병대를 기반으로 기계화 부대를 새롭게 창설하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함.
• 군부 숙청의 동기가 기병의 조직적 안전이나 기계화 계획의 폐기와 무관함.
- 기병대 규모의 변화
• 보병사단: 90개(1936년) → 150개(1939년)
• 기병사단: 32개의 기병사단(7개의 기병군단)(1937년) → 13개 사단(4개의 기병군단)(1941년 6월)
• 기병대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든 시기가 숙청이 최절정인 시점부터 숙청이 완료된 시점과 일치

■ 보로쉴로프 등이 기병감축을 주도 [143-144쪽]
- 기병감축과 기갑부대의 팽창은 군부 요직을 장악한 보로쉴로프와 기병대 출신 지휘관들이 주도한 것.
- 보로쉴로프의 명령으로 작성된 계획서(1937년 가을에 소집된 국방회의에 제출)
• 1937년 기병사단은 32개
• 7개를 기계화사단 등으로 개편, 25개를 1941년 말까지 13개로 감축.
• 조직 개편을 통해 1개 기병사단 병력수를 6,600명에서 5,900명으로 축소
• 그 결과 평시 적군 기병대는 57,130명이 감소된 총 138,560명이 됨.
- 기계화 부대의 증가
• 1937년 말: 경기갑 여단 25개, 중기갑 여단 4개, 예비기갑여단 3개, 차량화 여단 2개, 기계화 보병여단 3개
• 1941년 6월: 기갑사단 61개, 기계화사단 31개, 기계화보병사단 2개
- 1937년 말, 보로쉴로프가 부됸니의 토론
• 보로쉴로프: “현 시기의 전투와 전쟁수행을 위해 대규모의 전차부대를 유지・확대해야 하며, 기병대의 규모를 줄이거나 해체해서라도 기계화 부대의 수를 늘려야 한다.”
• 부됸니: “적군 내 기병 수는 이미 매우 적으며,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병을 달라고 소리칠 것이다.”
• 보로쉴로프: “당신은 기병대원의 심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당신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우리가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우리는 중세의 구닥다리 기병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 돈키호테도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기병이었다!”(주석 48)
- (주석48) [144쪽]
• 스탈린도 새로운 기술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함.
• 1940년 4월 핀란드와의 전쟁 상황을 논하는 자리에서, 현대전에서 항공기와 전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러시아 내전의 경험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태도를 경계함.
• 기병대 출신의 지휘관 M.P. 코발료프(M.P. Kovalev)를 지목하며 “내전 당시의 관행과 경험은 더 이상 적절치 못하며, 이러한 관행과 경험을 신봉하는 자들은 생존치 못할 것”이라고 함.


  V. 결론

■ 소련 군부 연구의 어려움 [145-146쪽]
- 소련 군부 연구의 어려움(1) - 기술결정론적 태도
• 역사가들은 군사문제를 연구할 때 기술의 역할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음.
• 기술결정론(technical determinism): 다른 주요한 요인들을 무시한 채, 모든 변화를 기술의 역할로 치환하는 태도
- 소련 군부 연구의 어려움 (2) - 정치 논리 
• 소련 붕괴 이전까지 소련 군부에 관한 연구는 학술적 토론이나 연구 결과보다 정치적 논리에 영향 받음.
• 소련에서 군사문제 연구는 주로 군인들이 수행함.
• 군부에 관한 역사 연구는 흔히 관련 지휘관들의 군 경력과 정치적 생존을 둘러싼 선전의 장으로 이용됨.
- 소련 군부 연구의 어려움 (3) - 정치적 혼란
• 소련붕괴 직후의 러시아 사회의 혼란과 많은 격변은 소련 군부라는 주제를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하기 어렵게 만듦.
• 시간을 두고 연구되고 논의된 저작들보다는 대중적 인기에 영합한 연구들의 등장
  
■ 향후 전망 [146-147쪽]
- 러시아 사회의 사회적・학문적 변화
• 소련 붕괴 이후 20여 년 동안, 러시아 사회의 안정과 문서고 개방 등
• 이러한 변화 속에서 느리지만 꾸준하게 연구가 진행
- 지금이 소련이 존재하는 동안 제대로 논의될 수 없었고, 소련 붕괴와 함께 같이 사라져버린 소련군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연구해볼 수 있는 시점
- 군사사에 대한 인식 자체가 드물고, 군사사를 정치사나 사회사 등과는 다른 역사학의 특수한 분과로 생각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사의 입지가 마련된다면 더욱 좋을 것.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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