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25

내 석사 논문은 왜 망했나



석사 논문을 쓰던 중 나는 내 논문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계획서 단계에서도 미진한 구석이 많았지만, 그래도 일단 쓰면서 뭔가가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선되지 않았다. ‘아, 이건 개소리인데’ 하면서 계속 썼다.

내 논문은 경제학에서의 과학적 실재론을 다룬다. 줄리안 라이스는 경제학에서의 설명과 관련하여 ‘설명의 역설’을 제기한다. 설명의 역설은, (i) 경제 모형은 거짓이고 (ii) 참인 모형만이 설명할 수 있는데 (iii) 그런데도 경제 모형은 설명한다는 것이다. 세 논제 각각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세 논제를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설명의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각 논제를 반박하는 것이며, 이는 경제학의 철학에서 잘 나가는 세 학자의 주장에 대응한다. 나는 그 중에서 우스칼리 매키의 국소적 실재론을 비판한다. 국소적 실재론이 틀리므로 국소적 실재론으로는 설명의 역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내 논문의 결론이다.

매키의 국소적 실재론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일단 그 이론이 무슨 이론인지 설명해야 한다. 나는 매키가 왜 경제학이 과학적 실재론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러기 위해 매키가 어떤 장치를 도입하는지, 모형의 어떤 요소가 실재론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국소적 실재론에 이러저러한 결함이 있다고 비판했다. 솔직히 국소적 실재론에 어떠한 결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국소적 실재론에 결함이 있다는 내 비판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매키의 국소적 실재론을 설명하는 부분을 다 쓰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경제학이 과학적 실재론의 대상인지만 가지고도 충분히 논문 주제가 되겠는데. 굳이 국소적 실재론을 다 설명하며 틀린 말을 할 필요가 없는데.’ 이미 때가 늦었고 손 쓸 수 없었다. 철학과에서 석사 논문 쓰는 데는 보통 6학기 정도 걸린다. 이미 나는 9학기였고 그 다음 학기부터는 지도교수님이 1년 간 연구년인 상황이었다. 교수들은 연구년에 보통 외국 대학에 간다. 그 학기에 석사 논문을 쓰지 못하면 상당히 곤란해지는 상황이었다. 경제학이 과학적 실재론의 대상인지를 가지고 논문을 썼다면 완성도도 높아지고 졸업도 한 학기 이상 앞당겨졌을 것인데, 나는 이 사실을 논문 쓰는 중간에 알았다.

어떻게 논문을 쓰기는 썼고 통과되기는 했다. 아무래도 선생님들이 봐줘서 통과한 것 같다. 기존에 다루지 않은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귀엽게 봐준 것 같다. 지도교수님의 다른 제자들의 선례로 볼 때, 내가 기존 주제를 가지고 이 정도 수준으로 논문을 썼으면 논문 심사장에도 못 가거나 통과해도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방생되었을 것이다.

온라인으로 논문이 공개되기 전까지 어떻게든 결함을 고치기로 했다. 선생님들이 봐주셨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논문의 모든 문장을 다 고쳤다. 그런데도 논문이 나아지지 않았다. 논문은 문장으로 구성되고 나는 모든 문장을 다 고쳤는데 이상하게도 논문의 동일성이 유지되었다. 테세우스의 배 같은 논문이었다.

논문을 수정하는 내내 어떻게 해야 덜 틀린 것으로 보일까 고민했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았으나 다 실패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설계상 결함이 있으면 시공사가 아무리 공사를 잘 해봐야 망한다는 것이다. 공사 도중에 설계 변경해서 잘된 예는 드물다. 이건 논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설계를 잘 해야 한다. 설계가 망했는데 공사를 강행하면 예정된 파국을 피하지 못한다.

설계가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학회를 열고 대학원생 모임을 한다. 그런 자리에서 발표를 하면 토론 시간에 온갖 비판이 쏟아진다. 왜 그런 자리에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발전시키지 않고 비판해서 죽이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의 성격을 잘못 파악해서 그러는 것이다. 학회나 대학원생 모임은 은행으로 치면 스트레스 테스트와 비슷하다. 여러 측면에서 제기되는 비판을 받고 파산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생각을 발전시키고 싶으면 두세 명씩 사적으로 자주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고, 위로나 격려를 받고 싶으면 애인이나 가족한테 받는 것이 낫다.

그러니까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은 되든 안 되든 남들한테 자꾸 보여주고 점검받고 도움을 구해야 한다. 진척이 있을 때마다 그래야 하고, 진척이 없어도 그래야 한다. 그래야 설계를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설계상의 결함을 줄일 수 있다. 나는 내가 뭘 하는지 남들한테 안 보여주고 혼자 꼼지락꼼지락 하다가 낭패를 보았다.

(2017.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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