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12

인문학적 정치인은 도대체 어떤 정치인인가?



아무데나 ‘인문학’이나 ‘인문학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심지어 ‘인문학적 정치인’이라는 단어도 생겼다. 도대체 인문학적 정치인은 어떤 정치인인가? 『싸우는 인문학』이라는 책에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인가>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안철수 현상을 인문학 붐과 연관 짓는다.


안철수 교수는 언젠가 ‘강남 좌파 아니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웃으면서 내놓은 대답은 이랬다. “강남에 살지도 않고 좌파도 아닌데요.”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인가?’라는 물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대꾸하고 싶다. [...] 강남에 살지 않고 좌파도 아니지만 그를 ‘강남 좌파’라고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꽤 많다.(27쪽)

일단 이 글은 시작부터 망했다. ‘인문학적 정치인’이라는 것부터 허구적인 개념이다. 인문학적 정치인은 있는데 왜 사회과학적 정치인, 공학적 정치인, 예체능적 정치인 같은 건 없는가. 애초부터 그딴 건 없었기 때문이다.

안철수에 대한 기대가 나타남과 함께 인문학이 호출되는 배경에는 무한 경쟁, 승자 독식, 양극화, 사회의 정글화 등의 시장주의 추세에서 벗어나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공동체적 가치로 전환하기를 바라는, 그리고 지난 한 세대 동안의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로 누적된 피로―가계 부채에서 우울증에 이르기까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있다고 소박하게 해석해볼 수 있다.(29쪽)

안철수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인문학 같은 소리나 하는 배경이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로 누적된 피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국민들의 소망”이라는 분석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런 근거는 이 글에 나오지 않는다. 그냥 그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가계 부채에서 우울증에 이르”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왜 인문학을 호출하는가? 인문학이 마법사의 돌인가? 사람들은 정말 인문학이 온갖 세상만사를 해결한다고 믿는가? 글쓴이는 그런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안철수 현상에는 기대를 걸어볼 만한 아주 독특한 면이 있었다. 국민들이 ‘관전’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지점, 안철수의 유보적 침묵이 바로 그것이다. [...]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호명한 까닭을 물었다. 정치공학적인 연출이 아니라 진심으로 묻는 것 같다. “왜 나를 부르는 겁니까? 나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죠?” 그는 국민을 큰 타자처럼 대한다. 이런 자세, 이런 물음의 진지함이, 여러 실망스러운 점들[...]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현상’에 기대를 걸게 했다.(33-35쪽)

글쓴이는 안철수의 유보적 침묵이 안철수 현상의 핵심이라고 본다. 유보적 침묵은 왜 중요한가?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면 잘할 거라는 기대가 아니었다. [...] 안철수 현상의 핵심에는 태풍의 눈 같은 ‘빈곳’이 있다. 안철수가 채우려 하지만 잘 안 되는 그 ‘빈곳’, 답하려 하지만 답할 수 없는 그 ‘물음의 자리’를 통해, 사람들이 비로소 정치적 소통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물음은 타자의 장(場)에서 발생하며, 기존 상징 질서가 깨지는 간극에서 나타난다. [...] 그런 물음이 발생하는 ‘빈곳’은 인문학적 사유가 돌아가는 바퀴축의 구멍 같은 곳이다.(35쪽)

안철수의 유보적 침묵은 정치 영역에서 ‘빈곳’을 만들며 여기서 인문학적 사유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유보적 침묵이 정치 영역에서 빈곳을 만든다는 것부터 개소리이지만, 백번 양보해서 유보적 침묵이 그러한 빈곳을 만든다고 치자. 모든 침묵이 그러한 빈곳을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고 유보적 침묵만이 그러한 침묵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유보적 침묵과 다른 침묵은 어떻게 다른가? 글쓴이는 이러한 물음에 제대로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빈곳 같은 건 애초부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정치인은 인문학적인 의미에서 정치의 자리에 서는 사람이다. 정치의 자리란 제도권 정치가 아니라 정치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태의 근원적 발생 지점을 가리킨다. 인문학적 정치는 (제도나 질서로서의) 정치 이전의 것이며 동시에 그런 현실 정치들의 근원적 발생처이다. 집합적 자아인 ‘우리’가 기성의 자기에 관한 앎을 (잃어)버리고, 자기에 관해 스스로 (되)묻고 (되)찾는 자리, 이것이 정치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맞닥트리는 물음의 자리이며,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인간 자신의 물음을 본질적으로 하는 성찰적 노동인 한에서, 인문학과 정치가 공유하는 공통의 자리이다. 인문학적 정치란 바로 그런 자리에 과감히 서려는 자의 과업이다. 무(無)―계급과 적대라는, 공동체의 자기-앎이 허위이자 무인 것으로 판명되는, 심연― 앞의 단독자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무 너머에서 오는 자를 예감하는 것이다.(40쪽)


그러니까 인문학적 정치라는 것은, 안철수 같은 이미지 정치인들의 공허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괜히 심각해하며 아무 내용 없는 허튼소리나 늘어놓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냐 방귀냐.

이런 류의 밑도 끝도 없는 글이 적지 않다. 말도 안 되는 글을 써놓고 “나는 자유롭게 떠들 권리가 있으니까 괜히 시비 걸지 마셔”라는 의미로 자기 글에 ‘인문학’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 정도면 똥도 인문학적으로 싸고 트림도 인문학적으로 할 판이다. 그런데 인문학 전공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가?

특히나, 일부 문학 전공자들은 아무 말이나 떠드는 것을 지식인의 사명인양 여기는 것 같다. 심각하고 비장한 어조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 전성기 때의 진중권에도 한참 못 미치는 사람들이 국내 정치부터 세계 경제까지 온갖 데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 다음에 인문학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우긴다.

물론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문학도 전문적인 학문이고, 전공자 중에 훌륭한 분도 많다. 내가 알기로, 청대 소품문 전공하다 고증학에 손을 대서 논어 주석서까지 펴낸 분도 있고, 조선 후기 문학 전공하다 조선사 학술서까지 출판한 분도 있다. 그런데 기껏해야 소설 몇 권 읽은 수준으로 보이는 일부 문학 전공자들이 아무 곳에 아무 글이나 막 기고해서 문학 전공자들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더 나아가 다른 인문학 전공자들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게 만든다.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어디서 그런 자신감을 얻어서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지 모르겠다.

더 문제는 언론이다. 특히나 진보 매체들이 왜 그런 사람들한테 지면을 할애해서 해당 매체의 신뢰를 떨어뜨리는지 모르겠다. 진보 매체는 보수 매체보다 자원이 적은데, 미친놈들의 망상에 한정된 자원을 할애하면 무엇을 가지고 보수 매체와 경쟁을 하려나 싶다.

* 참고 문헌

강양구 외, 『싸우는 인문학』, 반비, 2013.

(201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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