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9

토론식 수업에 대한 환상



언론에서 하도 토론식 수업이 좋다고 해서 그런지 토론식 수업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들은 수업 시간이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신기한 학습 효과가 생기는 줄 안다. 생각해보자. 내가 남들 앞에서 아무렇게나 주둥이를 나불거리는데 왜 사고력이 발달하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인데도 말이다.

토론식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려면 교수는 부지런하고 학생은 똑똑해야 한다. 우선, 수업 전에 교수는 읽을 자료를 나눠주고 학생들은 그것을 다 읽어야 한다. 아무 것도 안 읽고 생각나는 대로 떠들라고 할 거면 굳이 대학에 다닐 필요 없이 카페나 술집에 아무나 모여서 아무렇게나 떠들라고 하면 된다. 한 학기 등록금이면 1년 동안 매일 커피 한 잔씩 마셔도 돈이 남으니까 그게 더 경제적이다.

학생들이 얼마나 이해했는지 교수가 알아야 하니까 학생들은 수업 전에 자기가 어느 부분까지 이해했고 어느 부분부터 이해하지 못했는지 글로 써서 내야 한다. 교수는 수업 전에 그걸 다 읽고 수업에서 토론 진행 방향을 잡는다. 토론이 끝나고 학생들은 토론 내용에 대해 글을 써내고 그 다음 주에 있을 토론을 준비해야 한다.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소개하는 <news1>의 카드 뉴스에서도 핵심은 ‘토론한다’는 게 아니라 ‘읽고 토론한다’는 것이다.






토론식 수업이 너무 힘들고 들어가는 시간이나 노력에 비해 성과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강의식 수업을 한다. 강의식 수업이라고 해도 토론식 수업의 효과를 충분히 낼 수 있다. 보고서를 쓰게 하고 토론할 만한 내용을 쓴 보고서를 ‘선별해서’ 한두 시간 정도 토론하게 한다. 토론한 다음에 비평문을 써서 내고 비평문 중에서도 괜찮은 것을 골라서 한두 시간 정도 토론하게 한다. 여기서 보고서는 수업 자료를 요약 정리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알아서 자료를 찾아보고 나름대로 비판적으로 쓴 것이다. 중간 보고서 쓰고, 중간 보고서 중 선별해서 토론하고, 비평문 써서 내고 비평문 중에 골라서 토론하고, 중간고사 보고, 기말 보고서 쓰고, 기말 보고서 중 선별해서 토론하고, 비평문 또 써서 내고 비평문 중에서 골라서 또 토론하고, 기말 고사를 본다. 이런 수업에서는 시키는 것을 다 해도 학점이 잘 안 나온다.

언론에서는 강의식 수업이 마치 학생들의 사고력을 좀 먹는 절대악인 것처럼 다룬다. <EBS 다큐프라임>은 어떤 교육학 연구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A+를 받으려면 수업 중에 한 농담까지 받아 적어야 한다면서 대학 교육이 학생들의 창의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한 연구가 믿을만한 연구인지 의심스럽다. 수업 중에 한 농담까지 모두 적어서 성적이 잘 나온다는 건 오히려 수업에서 요구하는 학습량이 적다는 이야기다. 수업에서 요구하는 학습량이 많으면 수업에서는 핵심만 짚고 논리적인 관계를 잡아주는 정도만 할 수밖에 없다. 단순 암기로 수업을 해결한다는 건 학습량이 적을 때나 가능하다.

<EBS 다큐프라임>에서 학생 인터뷰를 보여주는데 경제학이든 이공계든 문제 풀어서 학점 나오는 전공의 학생들은 비교적 비중이 적었다. 내가 이공계는 잘 모르는데, 적어도 경제학과에서는 수업 중에 농담 받아 적든 말든 문제 못 풀면 학점이 작살난다. <EBS 다큐프라임>의 문제 제기가 몇몇 교양수업이 아니라 대학 교육 전반에 관한 문제인지 의심스럽다. 창의성을 측정하는 방법도 의심스럽다. 객관적인 측정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한테 본인은 얼마나 창의적인지 5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기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점수를 매긴 게 자료로써 무슨 가치가 있나 모르겠다. 설마 해당 연구를 한 연구자가 더닝-크루거 효과도 모르고 그런 식으로 측정 기준을 제시한 것은 아니겠지?

하여간, 토론식 수업을 제대로 한다는 건 교수든 학생이든 고난의 행군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 토론식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학교는 몇 군데 없다. 상당수 학교에서 진행되는 토론 수업은 인생 낭비, 자원 낭비일 뿐이다. 교수는 손을 놓고 학생은 정신을 놓는다.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과 수업하기 싫은 교수가 만나서, 학생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인생을 허비하고 교수는 아무 것도 한 거 없이 쉽게 월급을 받는다. 설치기 즐겨 하는 학생들이 앞장서서 자기들끼리 아무 말이나 떠든다.

원래 아무 말이나 떠들면 듣는 사람이 괴로워서 그렇지 말하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집단 심리상담만 받아도 비슷한 심리적인 효과가 나는데, 아무 것도 한 게 없으면서 수업 끝나고 강의실을 나갈 때 괜히 뿌듯하고 보람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멍청이들이 수업 끝나고 나오면서 마치 뭐 대단한 거라도 한 듯이 방끗 웃으며 뿌듯해한다면, 그 수업은 이미 망했다고 보면 된다.












* 링크: [news1] 4년 내내 고전 100권만 읽고 토론하는 이상한 대학

( www.news1.kr/articles/?2593634 )

(201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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