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8

독자를 피로하게 하는 글쓰기 - 임명묵 편



임명묵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노인들을 얼마나 존중해왔나”라는 칼럼을 읽었을 때 나의 첫 느낌은 피로감이었다. 글을 읽자마자 피로해졌다. 피로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필자는 관찰자로서 한남동 대통령 관저와 서부지법 집회를 찾았으나, 현장에서 관찰한 것치고는 칼럼에 드러난 유의미한 정보는 적고, 극우 시위대에 대한 이상한 정서적 동조 같은 것이 과하게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필자가 극우 시위대에 정서적으로 동조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정서적으로 동조한 것처럼 글을 썼다는 핵심이다.

글에 근거 없이 주장만 있다면, 특히나 그것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라면 독자의 피로도는 높아진다. 독자 자신의 평소 소신과 배치되는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필자 나름대로의 근거가 글에 있으면 독자는 그러려니 하고 그 다음 부분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데, 독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나 인상을 근거 없이 계속 나열하면 못 받아들인 주장이나 인상들이 계속 쌓여 일종의 인지적 부담으로 작용한다. 연설문 같은 글도 아니고 관찰자를 자처하며 무언가를 주장하는 글은 읽는 내내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여기에 3인칭 관찰자 시점 같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나온다고 해보자. 피로감이 극심해진다.

칼럼의 네 번째 문단을 보자.

그리고 보수 청년들은 냉전의 절정에 청년기를 보내며 생존을 위한 단결의 가치를 체화한 노인들과 빠르게 정서적 공감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약자로서 노인들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대다수 노인은 그리 부유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사회의 소외 계층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소위 ‘태극기 시위대’라 불리던 광장의 노인들은 좌우 양당의 주류 정치에서는 모두 조명되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8년의 기다림 끝에 세대를 건너뛰어 2030세대의 합류를 마주했을 때 전에 없던 환희를 느꼈다.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인간으로서 노인들과 대화한 청년들은 과거 노인층에 대해 갖고 있던 모든 심리적 장벽을 허물었다. 요컨대 이것은 한국인의 유교적 무의식을 자극하는 일종의 영적 체험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청년들은 노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관에서부터 부정선거 의혹에 이르기까지, 노년층이 주류 정치와 무관하게 발전시켜온 서사와 세계관을 그대로 흡수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반대 진영에서 ‘극우화’라 부르는 변화가 일어난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나 집회에 참석한 청년들은 아마 이것을 ‘충효화’라고 부르고 싶어 할 것이다.

극우 청년들이 태극기 노인네들과 정서적 공감대를 쌓고 노인들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는지, 노인네들이 환희를 느꼈는지 어쨌는지 관찰자로서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이러저러한 감정을 느낄 것으로 추론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칼럼에서는 그러한 판단의 근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당사자가 아니면 느끼기 어려울 감정을 서술하니 설사 필자가 극우 집회 참여자들에게 감정이 이입되지 않고 그들의 시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치 그들에게 감화된 사람의 정서적 진술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어떤 일화를 짤막하게 소개한 뒤 그들 사이에 어떤 연대감 같은 것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선을 그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주인공은 독자나 관객이 감정을 투영하거나 이입할 만한 대상으로 설정된다. 주인공이 악당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동이 정당화될 만한 장치를 깔아놓기 때문에 주인공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성공하기를 바라게 된다. 우리가 어떤 것에 감정을 투영하거나 이입하는 데는 에너지가 들기 마련이다. 우리가 바라는 방향대로 감정을 이입하면 에너지가 덜 들게 되고, 우리가 바라지 않는 것에 감정을 이입하면 에너지가 훨씬 많이 들게 된다. 가령, 어떤 연쇄살인마의 범죄 행각을 건조하게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내면을 보여준다면, 그리고 그 내면이 악마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면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독자나 관객은 해당 컨텐츠를 소비하는 내내 짜증 나고 피로할 것이다.

임명묵의 칼럼을 보고 들었던 피로감은 그와 비슷한 종류의 것 같다. 극우 시위대가 어떤 놈들이며 왜 저러나를 건조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에 동조하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무의식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고 영적인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인데, 시위대의 청년들과 노인들이 어울렁 더울렁 하는 것을 보고 “한국인의 유교적 무의식을 자극하는 일종의 영적 체험”이라고 하니, 필자가 시위 현장에서 느낀 바를 쓰는 것이 아니고서는 무엇이겠는가 싶은 것이다.

* 링크: [조선일보] 우리의 민주주의는 노인들을 얼마나 존중해왔나 / 임명묵의 90년대생 시선

( 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2/05/OBRTETE42BGP7EIV3Q573TSXWY )

(20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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