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6

[분석철학] Schlick (1932/1938), “The Future of Philosophy” 요약 정리 (미완성)



[ Moritz Schlick (1938), “The Future of Philosophy”, Gesammelte Aufsatze, 1926-1936 (Vienna: Gerold), pp. 118-133.

Moritz Schlick (1932), “The Future of Philosophy”, College of the Pacific Publications in Philosophy 1, pp. 45-62. ]

118-119

- 철학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연구될 수 있음.

• 관점(1): 역사가의 관점

• 관점(2): 철학자의 관점

- 역사가와 철학자는 각각 서로 다른 느낌으로 철학사의 연구에 접근할 것임.

• 역사가는 사상가들의 위대한 작품 등 모든 성과로부터 커다란 기쁨을 얻을 것임.

• 철학자도 전 시대에 걸친 천재들의 놀라운 작업에 고무될 것임.

- 그러나 철학자는 철학이 자기에게 주는 느낌이 역사가에게 주는 느낌과 똑같은 느낌이라는 견해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임.

- 철학자는 모든 사상 체계들에 관하여 그것이 아름다운지, 그것이 뛰어난지,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한지 등 역사가처럼 묻는 것에 만족할 수 없음.

- 철학자들이 흥미를 가지는 유일한 질문은 “이러한 체계들에 어떤 참(truth)이 있는가?”임.

- 이렇게 물었을 때 철학사를 살펴본다면 실망하게 될 것임.

• 수많은 체계들 사이에는 모순이 너무 많아서, 과학이나 기술 등에서와 같은 꾸준한 진보가 철학사에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임.

- 철학자들은 계속하여 서로 충돌하고 상대방의 견해를 비웃을 것인가, 아니면 마침내 전반적인 견해의 일치, 철학적 믿음의 통일이 있게 될 것인가?

119

- 위대한 철학자들은 모두 자신의 체계와 더불어 사유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자기들이 최종적인 참(final truth)을 발견했다고 믿었음.

• 예) 데카르트가, 그를 “근세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 방법을 도입했을 때

• 예) 스피노자가 수학의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려고 시도했을 때

• 예) 칸트가 그의 위대한 저작의 서문에서 이제부터 철학은 지금까지 오직 과학만이 그랬던 것처럼 확실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 그러나 역사가는 대체로 그러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음. 역사가에게는 그런 것이 우스꽝스럽게조차 보일 것임.

119

- 우리는 철학적 관점에서 “철학의 미래는 어떨까?”를 묻고자 함.

- 그러나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역사가의 방법을 사용해야만 함.

• 철학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우리의 지식으로부터 결론을 끌어내지 않고는, 우리는 철학의 미래가 어떨지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임.

119-120

- 철학적 견해에 관한 역사적 고찰의 첫 번째 결과는, 어떤 체계도 신뢰할 수 없다는 확신

-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 스피노자주의자, 칸트주의자 등이 될 수 없는 한, 유일한 대안은 회의론자가 되는 것임.

• 어떠한 참인 철학 체계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 것

- 꽤 많은 역사가들이 이러한 회의적인 결론을 이끌어냈고, 어떤 철학자들은 철학적 진보 같은 것은 없으며 철학은 그 자체가 철학사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음.

- 이러한 견해를 “역사주의”(historicism)라고 부름.

120

- 슐리크는 제3의 견해를 제시하고자 함.

• 견해(1): 궁극적인 참이 어떤 철학 체계에 있다는 것

• 견해(2): 철학은 없고 사상사(a history of thought)만 있음.

• 견해(3): 슐리크의 견해

- 종종 “만학의 여왕”이라고 불리었던 철학이 하나의 거대한 기만에 불과하다면, 이는 슐리크에게 이상해 보이는 일일 것임.

120-121

지금까지 위대한 철학체계들이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전반적인 승인을 받을 수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 저 심오한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이라고 보편적으로 간주될 어떤 철학체계도 앞으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됨은 물론이다.

만일 철학이 ’과학‘이라면 이런 체계가 있으리라는 기대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오한 문제에 대한 기대치도 않았던 만족한 해결이 과학에서 발견됨을 빈번히 보기 때문이며, 우리가 과학적인 문제의 어떤 특수한 점에 관해서 분명히 알 수 없는 때일지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의 과학자들이 더욱이 좋아서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리라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과학과 철학의 커다란 차이가 드러난다.

과학은 점진적인 발전을 보여준다.

비록 과학에 관하여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과학이 진보해 왔으며 또 계속하여 진보하리라는 점에 대 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철학에서는 이러한 진보를 찾아볼 수가 없는 바이다.

121

플라톤 시대에 토론되었던 것과 똑같은 중요한 문제가 오늘날에도 토론되고 있다.

어떤 문제가 한때 완전히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때일 지라도 이내 그 동일한 문제가 다시 나타나 토론되고 재고되게 마련이다.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철학자가 하는 일의 특징이다.

...

그는 어떤 철학문제에 관한 어떤 해결이건 충분히 확실하다고는 보지 않으며, 따라서 그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시 해결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학과 철학 사이의 이러한 차이가 우리로 하여금 철학의 미래의 진보에 대하여 심히 회의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대가 변하여 진정한 철학체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헛된 것이니, 우리는 어째서 철학은 과학처럼 영속적인 학문적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또 못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이유들이 옳다면, 우리는 어떠한 철학체계건 믿지 않아도 좋을 것이며, 그런 체계는 앞으로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121-122

동시에 나는 이러한 이유들이 철학이 취급하는 문제의 어려움에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인간의 이해력의 미약함이나 무능력에 있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다.

그 진정한 이유는 철학의 본성에 대한 기묘한 오해와 그릇된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과학적 태도를 구별하지 못한 데에 있다.

그것은 철학과 과학의 본성이 대체로 같으며, 둘 다 세계에 관한 진정한 명제의 체계로 되어 있다는 관념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철학은 결코 명제의 체계가 아니며, 따라서 과학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철학과 과학과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철학의 본성을 통찰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관계와 그 역사적 발전에 관한 탐구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철학의 미래를 예견하는 데 필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과학의 본성과 비교할 때 철학의 본성은 무엇이라고 생각되어 왔는가? 또 그것은 역사가 흐름에 따라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

122

여러분이 아다시피, 철학은 그 초기에는 단순히 '진리에 대한 탐구'의 다른 이름이라고 여겨졌으니-- 그것은 과학과 동일한 것이었다.

진리를 위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철학자라고 불리었던 것이며, 과학자와 철학자의 구별이 없었던 것이다.

122

이런 사태를 약간 변화시킨 사람은 소크라테스임.

소크라테스는 과학을 멸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초기의 철학자들이 oo하였던 천문학과 우주의 구조에 관한 견해를 모두 믿지 않았음.

그는 사람은 그런 문제에 관하여 아무런 확실한 지식도 가질 수가 없다고 믿고, 그의 탐구를 인간의 본성에 국한하였다.

...

그러나 우리가 후일에 인정하게 된 과학과 철학 사이의 대립을 지어놓은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그의 후계자들도 인간성의 탐구를 천체 및 우주의 과학과 잘 결합시켰음.

122

철학은 여러 과학들과 결합되어 있었으나 점차 과학들이 철학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함

이런 식으로 아마 수학, 천문학, 역학 및 의학이 차례로 독립하게 되었으며, 철학과 과학 사이에 차이가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하면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양자 간에는 통일이나 동일성이 유지되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과학은--나는 특히 물리학을 생각하고 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철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았다고 말해도 틀림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이론 물리학에 관한 어떤 대학 강좌는 공식적으로 “자연 철학” 강좌로 불림.

123

철학자 쪽에서는 과학자에 대해서, 또 과학자 쪽에서는 철학자에 대해서, 어떤 비우호적인 감정이 싹터서 양자 사이에 실질적인 적대관계가 시작된 것도 19세기에 있어서였다.

이러한 감정은, 철학이 관찰과 실험이라는 과학적 방법보다 더욱 고귀하고 훌륭한 진리발견방법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데에서 싹텄다.

독일에서는 19세기 초에 셸링, 피히테 및 헤겔이 철학자에게는 진리에 이르는 어떤 종류의 왕도가 준비되어 있지만, 과학자는 그저 기계적인 기술만이 요구되는 통속적이고 아주 지루한 실험적 방법의 오솔길을 걷는다고 믿었다.

그들은 과학자가 찾으려고 애쓰는 것과 똑같은 진리를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 철학적 천재에게만 마련된 지름길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

123

또 한 가지 견해는 철학은 世界에 관하여 알려질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진리를 다루지만 과학은 훨씬 특수한 진리를 취급한다고 보고, 과학과 철학을 구별하려는 견해이다.

...

123

철학은 어떠한 특수과학 분야에도 속하지 않는 가장 일반적인 진리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견해는 여러분이 거의 모든 교과서에서 발견하는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견해는 현대의 대다수의 철학자들이 취하는 견해이다.

예컨대 화학이 여러 화학적 화합물에 관한 올바른 명제와 관계하고, 물리학이 물리적 작용에 관한 참에 관계하는 것처럼, 철학은 물질의 본성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다.

또 이와 비슷하게, 역사가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개별 사건의 다양한 연쇄를 탐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역사철학으로서) 모든 사건을 좌우할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123-124

이런 식으로 철학은 가장 일반적인 참을 다루는 학문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보편적인 세계상, 모든 개별과학의 다양한 참들이 그 안에 자리잡고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통합되는 일반적인 세계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믿어짐.

...

철학도 하나의 과학, 개별과학보다 더 일반적이라는 성격을 가진 유일한 과학이라고 보는 이러한 소위 철학‘개관’은 내가 보기에는 굉장한 혼란을 야기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철학자에게 과학자의 성격을 부여했다.

철학자는 서재에 앉아서 수많은 책을 뒤적이며 마치 역사가가 여러 사료를 비교하듯이, 또는 과학자가 어떤 특수한 지식 분야의 특수한 연구에 종사하듯이, 많은 철학자의 다양한 견해를 책상 앞에 앉아서 연구하고 있다.

그는 과학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또 그 규모가 훨씬 일반적일 뿐이지, 어느 정도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실제로 믿고 있다.

그는 철학을 다른 과학과는 구별되는 훨씬 고상한 과학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다른 과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124

다른 한편, 이런 식으로 수행된 철학적 작업으로 성취된 실제의 결과를 보면 우리는 그것이 철학자가 생각하고 있던 이러한 세계상과 매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철학 연구 방식에는 겉으로는 과학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하등의 유사성도 찾아볼 수 없다.

과학의 결과는 계속하여 발전하며 다른 성과와 결합되어 일반적인 승인을 받고 있지만, 철학자의 작품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124-125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 것인가?

...

우리가 철학 교과서를 펴 보든가 현대의 방대한 저서의 하나를 훑어보면 우리는 종종 철학이 무엇인가를 찾는 과업에 엄청난 정력을 바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것은 어떤 다른 과학에 있어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물리학자나 역사가는 물리학이나 역사가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지면을 소비하지는 않는다.

철학은 어느 면에서는 가장 보통적인 진리의 체계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보편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제각기 다른 방식을 취함.

...

125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가장 보편인 과학이라는 철학 정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그 본질적인 본성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분명히 좀 우스운 일일 뿐더러, 지금부터 백년이나 천년 후의 미래 역사가 중에는 관한 토론이 우리 시대에 이렇게 심각하게 행해졌다는 사실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할 사람 도 있을 것이다.

토론이 이러한 혼란에 빠지는 데는 어떤 잘못이 있을 것이다.

‘보편성’이 철학을 ‘특수’과학으로부터 구별짓는 특징이 될 수 없다는 데에는 아주 결정적인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접어 두고, 좀 가까운 길을 거쳐 적극적인 삶을 내려 보겠다.

125

조금 전에 소크라테스를 언급할 때에 나는 그의 사상은 어느 의미에서는 자연과학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은 분명히 과학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과학 중의 '가장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종의 인생의 지혜이었다.

그러나 철학의 본성 뿐만 아니라 그의 특별한 태도를 이해 하기 위하여 우리가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특징은, 인간의 본성과 행위를 문제 삼는 이 지혜가 본질적으로 어떤 특수한 방법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방법은 과학의 방법과는 다른 것이며, 따라서 여하한 '과학적’ 결과에도 이르지 않는 것이다.

125-126

여러분은 모두 아마 플라톤의 대화편 몇 편을 읽었겠지만, 거기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질 과 대답을 주고 받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여러분이 그 대화편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것 --또는 소크라테스가 하려고 했던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그 대화편의 끝에 가서 나타날 어떤 일정한 참에 대개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그 모든 탐구가 수행된 제일의 목적은 어떤 질문이 제기되든가 어떤 낱말이 사용될 때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예컨대 플라톤의 어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무엇인가?"고 묻는다.

이 물음에 대한 여러가지 대답을 듣고는 소크라테스는 다시 이러한 대답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째서 어떤 말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쓰여졌는가를 물으며, 그 결과 그 제자나 반대가 전혀 그 자신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판명되기가 일쑤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의미의 추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표현의 의미와 명제의 진정한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사상을 명료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126

여기서 우리는 의미의 발견이 목적인 그의 철학의 방법과 참의 발견이 목적인 과학의 방법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보게 된다.

...

슐리크는, 과학은 ‘참의 추구’로, 철학은 ‘의미의 추구’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믿음.

소크라테스는 확실히 진정한 철학 방법의 실제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126

우리가 어떤 것을 진술할 때 우리는 어떤 문장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며, 그 문장은 명제를 나타낸다.

이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지만, 그 진위를 알거나 결정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 명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 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먼저 그 명제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 의미를 알고 난 다음에라야 우리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물론 서로 분리할 수 없게 연관되어 있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 참을 찾아낼 수 없으며, 만일 그 명제의 의미를 안다면, 비록 그 진리를 지금 발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명제의 참이나 거짓을 발견하기에 이르는 어떤 길의 단초는 알게 될 것이다.

슐리크는, 철학의 미래가 의미의 발견과 참의 발견 사이의 구별 여부에 달렸다고 생각함.

126-127

한 명제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또는 발언 되거나 기록되거나 인쇄된 문장으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결정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 줄 아는 여러 낱말의 머리 속에 그려 보고는 그 안에서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불행하게도 후자의 경우는 '철학적'이라고 생각되는 명제의 경우에 가장 빈번히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우리가 참으로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 의미의 궁극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이렇다: 그 명제가 참이 될 (또는 같은 결과가 되지만, 그것을 거짓이 되게 할) 상황을 우리가 정확하게 지시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그 명제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기술한다는 것만이 한 문장의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는 절대로 유일한 방법임.

그 의미가 분명해진 다음에야 우리는 세계 안의 실제적인 상황을 찾아서 그것이 우리의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지 거짓으로 만드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참이나 거짓을 결정하는 방법은 과학에 있어서나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아무런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지식이 발전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과학은 발전한다.

검증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과학적 진술을 검증하는 사실이 보통은 관찰되기 좀 더 어려울 뿐이다.

127-128

과학자나 철학자는 어떤 명제를 내놓을 때에 그 진리를 찾아내는 일에 착수하기 전에 반드시 그가 얘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사상가들이 어떤 명제의 의미가 분명해지기도 전에, 그들이 찾아내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알기도 전에, 그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아내려고 애써 왔다는 사실을 인간의 사상사에서 종종 발견함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때로는 심지어 과학적인 탐구에 있어서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

나는 전통적인 철학의 경우는 거의 언제나 그랬다고 말하고 싶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과학자는 두 가지 임무를 가짐.

그는 명제의 참도 찾아내야 하며 또한 그 의미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

과학자가 자기 과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명제의 숨은 의미 찾아내는 한, 그는 철학자이다.

모든 위대한 과학자들은 이런 철학적 방법의 놀라운 실례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과학의 초기부터 흔히 사용되어 온, 그러나 아무도 완전히 명확하고 결정적인 설명을 한 적이 없는 낱말들의 진정한 정의를 발견했던 것이다.

뉴튼이 ‘질량’의 개념을 발견했을 때, 그 때 그는 철학자였던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이런 류의 발견의 위대한 에는 '동시성'이란 말의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의미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분석이다.

...

의미와 참은 경험과정에 있어서 서로 연관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전자는 세계 안의 가능한 상황에 관한 단순한 반성만으로 발견되나, 후자는 이러한 상황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실제로 발견함으로써 결정되어진다.

첫번째 경우의 반성은, 소크라테스의 이 우리에게 그 가장 간단한 실제 사례를 보여준 바 있는 철학적 방법이다.

128

지금까지 내가 얘기한 것으로 보건대, 예를 들면 천문학이 천체에 관한 과학이요 동물학이 동물에 관한 과학인 것처럼, 철학은 의미의 과학이라고 규정되어야 할 듯이 보이며, 또 철학은 다만 그 주제가 다를 뿐, 즉 그 주제가 ‘의미’일뿐, 다른 과학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학인 듯이 보인다.

...

128-129

그러나 철학은 이러한 뜻의 과학은 아니다. 의미의 과학은 있을 수가 없으니, 의미에 관해서는 어떠한 참된 명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은 어떤 문장이나 명제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명제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임.

단순히 다른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어떤 명제의 의미를 설명하려 할 수는 없음.

내가 어떤 사람에게 “이것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그 의미를 기술할 어떤 문장으로써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으로 최후의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대답하는 문장은 또 하나의 다른 문장일 뿐이며, 나는 또 다시 “그것은 무슨 의미냐?"고 당연히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언제나 계속하여 "그러면 이 새로운 무엇을 의미하는가?"고 물을 수 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일련의 명제 외에는 그 의미에 도달할 다른 방법이 없다면, 이런 곳의 탐구는 끝이 없을 것이며, 그 의미는 결코 명료해질 수가 없을 것이다.

■ 사례: 백과사전 [p. 129]

당신이 어떤 어려운 낱말을 보았을 때 그 의미를 알고 싶으면,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찾아볼 것임.

그 낱말의 정의는 여러 술어로 되어 있다.

여러분이 그 술어들을 모르기라도 한다면 여러분은 또 그 술어를 찾아본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가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음.

마침내 여러분은 백과사전에서는 더 그 설명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단순한 도달할 것이다. 이런 술어들은 어떠한 것인가?

이런 술어들은 더 이상 정의될 수 없는 술어들임.

여러분은 그런 술어들이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예컨데 내가 전등갓이 노랗다고 말하니까 여러분이 나에게 내가 노랗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기술하라고 요구했다고 하자.--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어떤 색깔을 보여 주며, 이것이 노랑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문장이나 단어로써 그것을 여러분에게 설명하기만 전혀 불가능하다.

129-130

우리의 정의는 모두 어떤 예증, 어떤 활동(activity)으로 끝나지 않으면 안 된다.

색깔을 가리키는 이런 말의 의미에 그 색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어떤 정신적 활동에 의하여 그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 말도 있을 수 있다.

색감을 정의하기는 불가능하다.--그것은 보여져야 한다.

어떤 말의 용법을 이해할 수 있을려면 어떤 종류의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마 우리가 이런 말을 배운 방법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명제로써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명료하게 할 반성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성’이란 술어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 술어로써 실제로 의미되는 것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그 명제를 분석해야 하며, 또 아인슈타인이 한 것처럼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성이 실제로 결정되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실제적인 실험 관찰을 지시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철학적 활동이 일련의 명제로 대치되거나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어떤 명제건 그 의미의 발견은 궁극적으로 어떤 행동, 예컨대 노랑색을 보여주는 것 같은 어떤 직접적인 조처에 의하여 달성되어야 한다.

그것은 명제에서 주어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의미의 추구’인 철학은 명제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것은 과학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의미의 추구는 일종의 정신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130

철학적 성과가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또 '철학적' 물음에 답을 제공할 명제의 체계로 되어 있는 어떤 철학 체계가 수립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철학은 오해되었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특수한 철학적 문제 해결을 포함할 특수한 '철학적' 참은 없다.

철학의 과제는 모든 문제 및 그 해답의 의미를 찾아낸다는 데 있다.

철학은 의미 발견의 활동(the activity of finding meaning)이라고 정의되어야 한다.

130

철학은 활동이지 하나의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이 활동이 모든 개별 과학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개별 과학들은 어떤 명제의 진리성이나 허위성을 발견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

과학은 의미의 추구가 성공되기 전에는 진리 추구를 계속할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철학은 과학 내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니, 그것은 ‘모든 과학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충분히 들을 만하다.

130

과학의 여왕은 그 자신이 과학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과학들이 필요로 하는 하나의 활동으로, 모든 과학의 다른 모든 활동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실제적인 문제는 과학적인 문제이니 그 외의 다른 문제란 없다.

130

그러면 여러 세기동안 특별히 '철학적 문제'로 간주된 저 심오한 문제들은 어찌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질문 중에는 어떤 일정한 문법적 질서를 따라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전문인 것처럼 보이 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질문이 못되는 질문들이 많이 있다.

그 까닭은 그럴 경우 낱말들은, 그 함께 모여 있는 그대로는, 아무런 논리적 의미도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130-131

예컨대 내가 만일 "푸름은 음악보다 훨씬 동일적인가?" (Is blue more identical than music?) 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이 문장은 비록 영문법의 규칙을 어기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의미 도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문장은 전혀 질문이 아니요 단지 일련의 낱말일 뿐이다.

그런 데 주의 깊게 분석해 보면 대부분의 소위 철학적 문제들도 이런 경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문제들은 질문처럼 보여서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들은 한 갓 일종의 낱말들의 혼란 상태임이 밝혀진다.

그렇다는 것이 드러난 후에는 그 질문 자체가 사라지며, 우리의 학적 정신은 아주 평온해 진다;

질문이 없고 문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대답도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131

둘째로, 진정한 질문임이 입증되는 ’철학적‘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적절히 분석해 보면 이런 문제도 비록 지금으로서는 순전히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과학적 방법을 적용할 수 없지만, 과학의 방법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특별히 ’철학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과학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런 문제는 실제로는 대답될 수 없다 하더라도, 원리으로는 항상 대답될 수 있는 문제이며, 더구나 그 대답도 오직 과학적인 탐구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131

그러므로 모든 '철학적 문제'의 운명은 이렇다:

그 중 어떤 것은 우리 언어가 저지른 과오요 오해라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사라질 것이며, 다른 것들은 변장한 과학 문제임이 밝혀질 것이다.

이러한 소견은 철학의 미래를 좌 우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131

몇몇 위대한 철학자들은, 비록 정교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철학적 사유의 본질을 비교적 명확히 인지하였었다.

예컨대 칸트는 강의시간에 철학은 가르칠 수는 없다고 말하곤 했 다.

그렇지만, 만일 철학이 지질학이나 천문학 같은 과학이라면, 어째서 가르칠 수 없겠는가?

그렇다면 사실 철학을 가르치는 일이 확실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철학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을 때, 철학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낌새챘던 것이다.

이 문맥에 동사 philosophieren를 사용하고 명사 Philosophie를 퇴짜 놓음으로써 칸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이기는 하지만, 활동으로서의 철학의 특수한 성격을 명확하게 지적했던 것이다.

..

131-132

동일한 통찰의 유사한 예를 라이프니츠에서도 볼 수 있다.

그가 베를린 한림원을 창설하고 그 조직을 위한 개략적인 계획을 세웠을 때, 그는 그 안에 모든 과학의 위치는 정해 주었으나 철학은 거기 끼지 못하였다.

라이프니츠가 과학의 체계 안에 철학의 자리를 두지 않았던 것은, 철학은 특수한 진리의 추구가 아니라 모든 스며들 하나의 활동임을 명백히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132

- 슐리크가 옹호하는 견해를 현대에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임.

그는 자기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서술함:

“철학의 목표는 사상을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함에 있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의 과제는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명제의 명증화이다.”

이것은 내가 여기서 설명하 려 애써온 바로 그 견해이다.

132

이제 우리는 어째서 철학은 보편과학으로 간 주될 수 없는가를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철학이 이렇게 오해된 것은, 명제의 '의미'가 어느 면에서는 모든 논의의 기초가 되는 까닭에 그것이 무슨 '보편적'인 것인 양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어째서 고대에는 철학이 과학과 동일시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세계를 서술하는 데 사용된 개념들이 모두 매우 애매하였기 때문이다.

과학에게 임무가 부과된 것은 명료한 개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서서히 발전함에 따라 개념들은 명료하게 되게 마련이니 과학적 탐구의 노력은 주로 이 명증화에 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탐구는 철학적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 과학과 철학은 구별될 수 없었던 것이다.

132

이와 같은 우리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윤리학이나 미학 같은 어떤 특수한 연구분야는 '학적'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철학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활동이기 때문에, 부분이나 독립적인 여러 분야로 나누어질 수는 없는 하나의 통일체(unit)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탐구들이 철학이라고 불리는가?

그것은 그런 탐구들이 과학적 단계의 초기에 처해 있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 심리학도 그런 것 같다.

윤리학과 미학은 확실히 아직도 충분히 명료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연구의 대부분은 아직도 그 개념들을 명료화하는 데 바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을 철학적이라고 부름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장차 그것들은 당연히 과학의 위대한 체계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132-133

미래의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의 방법은 겉으로나마 취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기를 나는 바란다.

...

철학 책들은 대부분 마치 과학책인 듯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는 철학책이 과학의 언어 사용하는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의 발견이 진리의 발견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 질 수는 없다.

이 차이는 미래에는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

133

나는 마치 내가 과학적 탐구와 철학적 탐구의 실제적인 분류를 주장하고 있는 듯이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그 반대로 대부분의 경우 미래의 철학자들은 과학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탐구할 어떤 주제를 갖는 것이 그들로서는 필요할 것이며--그래야 그들은 특별히 그 과학의 기초에 있 어서 혼란되고 애매한 의미의 사례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관계하는 많은 문제에 있어서도 의미의 명증화는 크게 요구될 것이다.

몇몇 사상가들, 그 중에서도 아마 가장 뛰어난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실천적인 분야에 특별한 재질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철학자는 과학이 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는 이해가 깊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賢明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133

나는 철학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견해가 미래에는 일반적으로 채택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체계로서의 철학을 가르치려고 기도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명ㅐ함을 추구하는 진정한 철학적정신으로 특수 과학과 그 역사를 가르칠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후세의 철학적 정신을 계발시킬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 전부이지만, 그 것은 인류의 정신적 진보의 위대한 발걸음 될 것이다

(202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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