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전원주택 진입로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자동차가 내 근처로 오더니 차에서 어떤 여자가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정장을 차려입었는데 약간 번쩍거리는 느낌이 있는 소재로 된 것이었다.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눈가 주름으로 보아 나보다 나이가 한참은 많아 보였고 쌍꺼풀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그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거는데 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그 여자는 몇 번을 다시 말했다. 중국교포가 아니라 중국인인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났다. 그 여자가 당장 나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겁이 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원주택 단지와 내 소유인 진입로 근처 땅 사이에는 빈 땅이 있다. 원래는 우리집 땅이었는데 아버지가 헐값에 팔고 다른 사람 땅이 되었다가, 그 땅을 산 사람이 헐값에 땅을 사고도 토목공사 비용 등을 감당하지 못해 법원 경매로 넘어가서 주인이 몇 번 바뀌었다. 가장 최근에 그 땅을 산 아저씨도 땅을 값싸게 샀다고 하는데, 토목공사 비용 관련 채무와 얽혀서 개발하지 못하다 최근에 업체와 합의를 보았다고 건설업체 직원에게 들었다. 그런데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나에게 땅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때 한참 부동산 가격이 오를 때 외국인 부동산 매입 규제를 풀었다더라, 중국인들이 아파트를 쓸어담고 있다더라 하는 내용의 언론 보도를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빈 땅을 중국인이 샀다고 해보자. 부동산, 건설, 중국, 그 다음에 떠오를 만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인공지능한테 물어봐도 ‘깡패’나 ‘조폭’이 답변으로 나올 것이다. 빈 땅 서쪽에 있는 전원주택 단지에서는 하수도로 쓸 만한 배수로의 출구를 막았고, 빈 땅 동쪽 진입로에서는 내가 깔짝거리고 있다. 중국 깡패가 손도끼를 들고 찾아온다면 나는 대응할 수 있나?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나보고 진입로 근처에서 무엇을 하는지 한참 묻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여자는 상대방 남자와 한국어 한 마디 안 쓰고 중국어로만 대화했다. 더 무서웠다. 통화가 끝난 후, 나는 공사 차량 이외의 차량은 통과할 수 있게 했고 공사 차량은 서쪽 길로 허가가 날 테니까 전원주택 단지 사장하고 합의해야지 나는 전혀 모른다고 설명하고 그 여자를 보냈다. 그래도 한참 동안 공포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 느낀 공포심은 똬리를 튼 살모사를 보았을 때나 맹렬하게 짖는 목줄 풀린 개를 보았을 때 느낀 공포심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가시적인 위협이 전혀 없으나 오히려 살모사나 개를 마주했을 때보다 강렬하고 오래 지속되는 공포심이었다.
그런 종류의 공포심을 느낀 후 두 가지를 이해까지는 아니고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는 여자들이 밤길이 무섭다고 할 때의 대충 이런 식의 공포심을 느끼겠다 싶은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한국의 치안 상태를 운운하면서 밤길 무섭다고 하는 여자들을 망상병 환자로 모는 경향이 있는데, 두려움은 통계 자료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하나는 흑인 용의자를 과잉진압하는 백인 경찰들이 이런 식의 공포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었다. 당연히, 그러한 행동을 하는 백인 경찰이 잘 했다거나 정당하다고 하는 건 절대로 아니고, 아마도 공포심이 그러한 과잉진압을 추동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인종 차별에 명백하게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공포심이 순간적으로 확 올라오는 것에 대응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중국이나 중국인에 대해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공포심을 느끼고 나니 그러한 것을 해결하는 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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