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1

비트코인 화폐철학과에 대한 생각



한양대 대학원 협동과정에 ‘비트코인 화폐철학과’가 생긴다더니 정말로 생기나 보다. 이미 한양대 인문과학대학에 비트코인화폐철학 최고위과정이 생겼고 1기 모집 공고문까지 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비트코인 화폐철학과에서는 “블록체인과 철학을 접목”하고 “암호화폐의 근간이 되는 ‘탈중앙화’와 ‘신뢰’ 등 인문학적 접근으로 비트코인 생태계를 교육”한다고 한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인다. 암호화폐로 돈이나 벌면 되지 거기에 철학이 붙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 비트코인 화폐철학과가 생긴다는 것을 구실로 철학과 인력을 줄이지만 않는다면 철학 쪽 사람들한테는 어떻게든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기존 인력을 이용하여 추가로 수업을 개설한다면 그들의 수입이 늘어나니 좋은 일이고, 새로 인력을 충원한다면 더 좋은 일일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학위가 있다면 거기서 강의 한 자리라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트코인 화폐철학과라는 게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니, 적당히 느슨하여 학생들에게 부담이 적으면서도 외부에 공개되어도 얼핏 좋게 보일 만한 교안을 짠다면 대부분 직장인일 학생들도 만족할 것이고 학교도 만족할 것이다.

가령, 화폐의 본질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문이 코철러코타(Narayana R. Kocherlakota)가 쓴 “Money Is Memory”(1998)과 칸(Charles M. Kahn) 등이 쓴 “Money Is Privacy”(2005)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아직 읽지는 못했다), 학생들하고 이걸 같이 읽어본다고 해보자. 학생들 중에 해당 논문을 읽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그 학생보고 발제하라고 하고 나는 “얼씨구!” 하면서 추임새를 넣으며 적당히 토론시키고, 발제한 학생한테 그 논문 왜 읽었는지, 어디서 어떻게 읽었는지 물어봐서 참고 문헌 얻고, 그걸 다음 학기 수업에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준 오츠카(Jun Otsuka)가 지은 『Thinking about Statistics: the Philosophical Foundations』(2023)를 장별로 읽고 발제를 시킬 수도 있겠다. 그 책의 4장 같은 경우는 정교한 모형이 항상 더 나은 예측을 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현실을 약간 ‘왜곡’하는 모형이 더 나은 예측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모형을 데이터에 너무 정확하게 맞추다 보면 과적합(overfitting)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확률론적 과정으로부터 얻은 데이터 세트에는 반드시 산발적인 노이즈가 포함되는데, 복잡한 모형이 노이즈에 적합하게 되면 오히려 예측 모형의 능력이 손상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방법 중 하나는 모형의 예측 성능을 평가하는 아카이케 정보 기준(AIC)이다. AIC 이론은 모수가 너무 많으면 모형의 예측 성능이 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준 오츠카는 이를 카트라이트와 연결한다. 카트라이트는 “Do the Laws of Physics State the Facts?”(1980)에서 물리 법칙에서 사실성(참)과 설명력 사이의 상충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학생들한테는 4장을 발제하라고 하고, 나는 카트라이트 논문을 소개한다면 이렇게도 대충 한 주 수업을 때울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대부분 금융 쪽 직장인들일 것이니 수업이 토요일에 개설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수업 끝나고 그냥 돌아가기 그러니까 학생들끼리 술 한 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트코인 화폐철학과가 학문후속세대 양성하라고 만든 것은 아닐 것이고 최고위과정 심화 버전일 것이니 수업 내용보다도 수업 끝나고 함께 하는 술자리가 학생들에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최고위과정이 독서클럽이고, 부자들의 독서클럽이 최고위과정 아닌가?

하여간, 그렇게 술을 먹게 되면 교수를 빼놓고 먹기 좀 그러니까 교수도 술을 마실 것이고, 교수하고 학생이 술을 마시면 교수가 돈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거기 학생들은 교수보다 돈이 많을 테니 학생이 돈을 낼 것이고, 학생들이 돈이 많으니 소주 같은 거 안 먹고 좋을 술을 마실 것이다. 학생들은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비실비실한 사람들이 아니라 잔뼈가 굵은 사람들일 것이고, 그런 사람들과 술 한 잔 하면서 업계 이야기도 들을 것이고, 또 그 사람들이 내가 마음에 들면 회사에서 하는 일에도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설사 비트코인 화폐철학과의 교원이 비-정년트랙이라고 하더라도 웬만한 철학과 교수보다 좋을 수도 있다. 학문적 자식을 키울 수 없지 않겠느냐고 걱정하거나 아쉬워할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건 학문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나 고민할 일이고, 나는 생물학적 자식이나 잘 키우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생들을 어떻게 잘 엮어서 과학철학회에 기부금을 내도록 잘 땡겨온다면 또 어떨까? 학계에 대한 의리를 철학으로 갚는 것도 좋은 일이겠으나 그건 철학 잘 하는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라고 하고, 돈으로 갚을 수 있으면 돈으로 갚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괜히 대단치도 않은 논문 자주 내봐야 심사한다고 고생만 할 텐데 돈으로 내면 학회에서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방금 평행 우주의 또 다른 나를 보고 왔다. 그곳의 나는 부유하고 행복해 보였다. 평행 우주의 나는 몇 년 전에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여기에 있는 나는 박사학위가 없고 언제 받을지도 요원하다. 이렇게 더없이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분하지만, 다른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니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 링크(1): [한경BUSINESS] 한양대, '비트코인 화폐철학과' 신설 추진…공대 아닌 인문대

( https://magazine.hankyung.com/business/article/202404127550b )

* 링크(2): [공지]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비트코인화폐철학 최고위과정 1기 모집

( https://bitcoinamp.hanyang.ac.kr/-?p_p_id=board_WAR_bbsportlet&p_p_lifecycle=0&_board_WAR_bbsportlet_action=view_message&_board_WAR_bbsportlet_messageId=708618 )

(20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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