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omas S. Kuhn (1996),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3rd e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160-173.
토머스 S. 쿤, 「13장. 혁명을 통한 진보」, 『과학혁명의 구조』, 김명자・홍성욱 옮김 (까치, 2013), 275-292쪽. ]
■ [pp. 160-161, 275-276
왜 과학 활동은, 예술, 정치 이론, 철학이 변천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꾸준히 진보하는가?
이러한 질문의 일부는 전적으로 의미론적임.
거의 모든 경우 ‘과학’이라는 용어는 확실한 방식으로 진보가 일어나는 분야에만 쓰임.
현대의 사회과학들이 진짜 과학인가에 관한 논쟁이 되풀이될 때마다 이러한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남.
전-패러다임 시대에 경험했던 논쟁과 비슷함.
그러한 논쟁을 관통하는 쟁점은 난감한 용어의 정의임.
과학의 정의가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 과학자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가?
경제학자들이 그들 분야가 과학인지에 관하여 사회과학의 다른 분야의 학자들보다 논쟁을 덜 하는 것은, 그들이 과학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합의를 이룬 것이 경제학이기 때문인가?
■ [p. 161, 276-277
고대나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 수세기 동안 회화는 누적적 발전을 하는 분야로 간주됨.
화가의 목표는 묘사라고 생각함.
회화와 조각의 목표가 묘사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원시적인 모형으로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예술과 다른 분야의 간극이 깊어짐.
■ [pp. 162-164, 277-280쪽]
과학이라서 진보하는 것인가, 진보하는 것이라서 과학인가?
정상과학 같은 활동이 왜 진보하는가?
과학자든 비-과학자든 단일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성공적인 창의적 작업의 결과는 진보여야 함.
우리가 비-과학 분야의 진보를 의심한다면, 그것은 각 학파가 발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경쟁 학파가 서로 다른 학파의 기반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임.
과학에서도 진보에 대한 의구심을 품는 경우가 있음.
혁명 시기에는 이러한 의심 표출.
발전이 분명하고 동시에 확실해 보이는 것은 정상과학 기간에 한정됨.
전-패러다임 기간과 과학혁명 동안 과학자 사회는 그 연구의 결실을 다른 방식으로는 볼 수가 없음.
경쟁 학파가 없으면 원리에 대한 끊임없는 재검토 요구에서 해방됨.
현상의 가장 미묘하고 난해한 부분에 집중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효율성과 능률이 증대됨.
■ [p. 164, 280-281쪽]
이러한 성격들 중 일부는 성숙한 과학자 사회가 일반인과 일상생활의 요구로부터 고립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임.
일반 사회와의 단절로, 과학자 사회만의 공유된 기준에 맞추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음.
과학자는 그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공유하는 동료들만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까닭에, 단일한 한 벌의 기준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
반대로, 사회과학은 사회적 요구에 상당 부분 의존함.
해결책 강구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와 관련하여 연구 문제를 선택하는 것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음.
예) 인종 차별의 결과, 경기 순환의 원인 등
어느 집단이 문제를 더 빨리 해결할 것인가?
■ [pp. 164-165, 281-282쪽]
일반 사회로부터의 격리는, 전문 과학자 공동체의 또 다른 특성인 과학 교육의 본성에 의해 강화됨.
음악, 회화, 문학 등에서는 이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함으로써 배움.
교과서는 부차적 역할만 함.
역사, 철학, 사회과학에서는 교과서가 더 큰 의미를 가지지만, 대학의 기초 과정에서는 원전 자료를 병행하여 강독함.
자연과학에서는 대학원 과정 3-4년에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하기 전까지 주로 교과서에 의존함.
다수의 과학 교과 과정은 대학원생들도 학생을 위하여 쓰지 않은 저술은 읽지 말라고 요구함.
과학자 교육의 최종 단계에 이르면서, 교과서는 독창적인 과학 문헌으로 체계적으로 대체됨.
과학에서 이러한 교육이 가능한 것은 그들의 패러다임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임.
알아야 할 것들이 모두 더 간결하고 정확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최신 교과서에 요약되어 있으므로, 뉴튼, 패러데이, 아인슈타인, 슈뢰딩거의 논문을 읽을 필요가 없음.
■ [pp. 165-166, 282-283쪽]
정상과학기의 과학자 사회는 그 패러다임이 규정하는 문제나 퍼즐들을 푸는 데에 굉장히 효율적인 도구가 되며, 그 문제들을 해결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발전일 수밖에 없음.
그러나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 과학자는 잘 대비된 상태가 못 됨.
새로운 접근법을 발견할 인물을 양성하도록 잘 짜여 있지 못함.
누가 패러다임의 새로운 후보를 들고 나오는 한, 경직성으로 인한 손실은 오직 개인에게만 일어날 뿐임.
그 변화가 영향을 미치는 세대에 이르게 되면, 개인적인 경직성은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패러다임으로부터 패러다임으로 옮겨갈 수 있는 집단과 양립함.
이러한 상황은 과학자 사회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알림.
■ [pp. 166-168, 283-285쪽]
승리자의 관점에서, 승리의 결과는 발전일 수밖에 없다. 진보가 아니라면, 상대편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
또한 승리자들은 자기들 사회의 미래의 구성원들이 과거 역사를 자신들의 관점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도록 만들며, 때로 이는 역사의 왜곡을 초래하기도 함.
혁명기에 초래된 손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음.
그렇다고 해서 결국 힘의 논리인 것만은 아님.
과학혁명에는 손실도 따르지만, 과학존재의 의미는 어느 특별한 유형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있음.
■ [p. 168, 285-286쪽]
과학자 사회의 본질적 특성
자연계의 거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을 쏟아야
잘 정의된 과학자의 전문 동아리 사회
과학적인 주제들을 놓고 일반 대중을 향하여 호소하지 말 것
과학에서의 진리가 하나일 수 있는가?
■ [pp. 168-169, 286-287쪽]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서 해결되는 문제의 수효와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효율적인 장치이다.
■ [p. 169, 287쪽]
패러다임의 조건
조건(1): 여타의 방식으로는 대처될 수 없는 두드러지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문제를 해결하는 듯이 보여야 함.
조건(2): 선행 패러다임들을 통해서 과학에 조성되었던 구체적인 문제 해결 능력의 상당히 큰 부분을 보전하리라고 기약되어야 함.
그러나 이것이 절실한 요건은 아님.
■ [pp. 169-170, 287-288쪽]
패러다임 선택에 기준은 없을까?
혁명은 과학자 사회의 전문적 관심의 영역을 좁히고, 전문성의 정도를 높이며, 일반인과 과학자 그룹을 포함한 다른 그룹과의 의사소통을 저해함.
과학의 깊이는 확실히 깊어지겠지만, 그 폭은 그렇게 넓어지지 못할 것임.
그러나 여러 가지 손실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정확도가 계속해서 증가하리라는 실질적인 보장을 제공함.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서 해결되는 문제의 수와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효율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음.
과학자 사회는 혁명 과정에서의 일부 손실을 감수하지만, 그 손실에도 불구하고 과학자 사회의 성격은 과학에 의해서 해결되는 문제들의 목록과 각각의 문제 해결의 정확도가 둘 다 계속해서 증가하리라는 실질적인 보장을 제공함.
170-, 288-
■ [p. 173, 292쪽]
과학에는 다른 유형의 발전이 있을 필요가 없음.
우리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과학자와 과학도들을 점점 더 참에 가깝게 이끈다는 관념을 버려야 할지도 모름.
과학에 고정된 목표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음 (진화의 비유)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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