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4

[과학사] Grant (2006), Ch 6 “The Medieval Universities and the Impact of Aristotle’s Natural Philosophy”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Grant (2006), Science and Religion, 400 B.C. to A.D. 1550: From Aristotle to Copernicus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pp. 165-190. ]

1. The Translations of Aristotle’s books on Natural philosophy

2. Universities in the Middle Ages

3. Types of Literature in Natural Philosophy

4. The Relations between Natural Philosophy and Theology in the Thirteenth century

4.1. Tensions between the Faculties of Arts and Theology

4.2. The Condemnation of 1277

5. Is Theology a Science?

165

11세기 말 무렵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스페인과 시칠리아에 있는 아랍인들이 자연 철학과 과학에서 훨씬 많은 전문 지식을 축적했다는 사실을 알았음.

엄밀히 말하면 이는 그 이전부터, 학습의 중심이었던 톨레도와 시실리아를 1085년과 1091년에 각각 정복한 뒤로부터 지식 격차를 절감함.

그들은 비잔틴 왕조의 그리스인들이 각지에서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논문들을 그리스어로 썼다는 사실도 인지했음.

결과적으로 그리스와 아랍의 과학의 라틴어 번역은 12세기부터 13세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짐.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어원이 같기 때문에 오역의 가능성이 낮았고, 아랍어에서 라틴어로의 번역보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의 번역이 선호되었음.

165-166

모든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고, 린드버그(David Lindberg)는 이에 대해 번역이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함.

광학이나 천문학 역학 수학, 연금술 등의 연구가 12세기 초・중반 번역되었지만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큰 영향일 미치지는 않았음.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 그에 대한 아베로에스(Averroes)의 주해가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음.

이러한 번역은 중세 과학사와 종교의 관계에 큰 전환점이 됨.

1. The Translations of Aristotle’s books on Natural philosophy

166-

12세기 초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들은 번역됨.

대표적인 번역가들은 James of Venice와 William of Moerbeke

베니스는 역학, 영혼에 대하여 the parva naturalis와 형이상학의 일부를 번역했음.

모에르베크는 48개 이상의 논문을 번역하였는데 아르키메데스의 수학과 역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연구, 과학철학 등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으며 이전 번역을 수정, 확장하기도 함.

모에르베크는 <Commentary on the sould>과 <Commentary on the Heavens>를 번역하기도 했는데 그의 초창기 수혜자는 아퀴나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On the Soul>, Physics simplicius의 <Commentary on On the Heavens> 등을 모두 이용함.

167-

비록 많은 과학 작품들이 12세기 초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지만 (당시 번역가들로는 Plato of Tivoli, Adelard of Bath, Robert of Chenster, Hermann of Carinthia, Dominicus Gudissalinus 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대한 초기 번역은 12세기 중반 이후 이루어짐.

가장 저명한 번역가는 (1) 크레모나의 제라드(Gerard of Cremona)

그는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과학 의학 및 자연 철학에 걸쳐 다양한 저작들을 번역했으며 갈렌의 의학 논문, 프톨레마이오스의 Almagest를 번역함.

그는 아랍어 서적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위해 직접 아랍어를 배운 것으로 전해짐.

30년 간 71권 이상의 책을 번역하였으며 수학 천문학 의학과 연금술을 포괄하는 다양한 연구 번역에 관여함.

제라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대부분 번역했으며 <Physics>, <On the Heaven>, <On Generation and Corruption>, <Meteorology>, <Analytics>, <Posterior Analytics>를 모두 번역함.

168-

또 다른 유명한 번역가는 (2) Michael Scot

그는 아베로에스(Averroes, Ibn Rushd)의 자연철학 주해를 번역함.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대한 주해에 있어서 아랍어에서 라틴어로의 번역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에 대한 대답은 해리 오스트린 울프슨(Harry A. Wolfson)이 제공함.

울프슨은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 그리고 히브리어에 능통하였으며, 본인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철학의 권위자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이 중세 대학에서 기본서로 채택된 이후 그의 번역서는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중요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원고를 손으로 쓴 까닭에 다양한 해석의 차이가 존재했다는 점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세 자연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 대한 전반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보임.

2. Universities in the Middle Ages

169-170

13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두 가지 큰 변화가 서로 뒤엉키게 됨.

1200년 즈음에는 이미 옥스포드, 파리, 볼로냐에서 대학들이 설립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과 논리학 저서들이 많이 널리 읽힘.

13세기 초 그리스와 그리스의 주요 논문 과학 및 자연 철학의 그리스 및 아랍 원문의 라틴어 번역본이 이용 가능해지면서 옥스포드나 파리 대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기반으로 한 자연철학 강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됨.

1210년 “파리에서 공개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이나 논평에 관한 책들을 이용한 모든 강의들을 금지한다”고 한 법령은, 자연 철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가 쉽게 이용가능하지 않았더라면 이를 금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임을 보여줌.

170-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은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파리 대학에 국한되어 있었고, 옥스포드나 볼로냐에서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았음.

대학은 중세의 산물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음.

선생님의 명성으로 학생들을 온 지역에서 끈 성당학교로 시작되어 대학들이 생겨남.

중세 시기(11세기-12세기)에 유럽은 급속도로 도시화됨.

도시화된 개인의 행동 양식보다 중요하게 서유럽 지식인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독특하고 필수적인 기관으로서 대학이 부상함.

이는 유럽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도 독특한 양상을 띠며, 그 주요한 특성은 상당수의 교수와 학생들을 포함한다는 점

가장 먼저 대학이 설립된 파리, 옥스포드, 볼로냐의 경우에도 다수의 교수와 학생들이 이주자였으며, 그들은 초기에 자신들의 이권을 확보하고 세력을 넓히기 위해, 일종의 길드처럼, 대학의 규모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추정됨.

대학은 로마의 선례를 따른 중요한 중세의 법적 개념

교회나 주의 개념은 특정 분야에 종사하는 개인이 법적 권리를 갖고 단체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됨.

예컨대, 대학의 멤버는 대표자를 선출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었고, 선출된 대표자는 법적으로 법원이나 주나 교회 당국과 관련된 행정에서 대학을 대신함.

단체로서의 정체성은 대학에게 큰 혜택이었음. 자율성을 인정받았고, 단체 내의 교수와 학생들은 자율적인 권리를 인정받은 만큼 특정 의무를 부여받기도 했음.

법적인 의무와 권리 내에서 대학은 사실상 영구적인 기관으로 확립되었으며 그 구조적 안정성은 예술 및 인문학, 의학, 법학 그리고 신학 학부로 구성되었고, 이는 자연 철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됨.

3. Types of Literature in Natural Philosophy

172-174

중세 자연 철학자들은 교과목을 설명하는 세 가지 방식을 발전시킴.

그 중 두 가지 포맷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연구와 직결되어 있었으며 세 번째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자연철학의 주제들을 담기에 용이했음.

자연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니콜 오렘(Nicole Oresme)은 <On Seing the Stars>에서 과학사에 크게 공헌하며, 빛의 굴절이 하나의 매개나 변화하는 밀도에서 커브형으로 굴절한다는 것을 밝힘.

이 굴절 궤도를 추론하기 위해 무한 급수를 활용함.

대니 버튼(Danny Burton)은 이에 대해 빛의 굴절 현상을 밝힌 인물이 뉴턴이나 후크가 아니라 오렘이라고 주장함.

174-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는 크게 요약, 주해, 문답으로 분류됨.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원문을 읽고 자기 생각을 밝히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원문과 이에 대한 해석은 분리함.

이는 아퀴나스, 월터 벌리(Walter Burley), 니콜 오렘의 강의법이기도 했음.

과학철학이 논문으로 쓰이는 방식은 주해(commentary)나 문답(questions)

문답법의 경우 여섯 단계를 거치는 아웃라인이 존재했는데, 그 형식은 다음과 같음.

1. Whether로 시작하는 질문

2. 저자의 기본 주장에 대한 반박

3. 권위에 근거한 (저자에 대한) 추가 반박

4. 질문에 대한 설명 및 개념 상술

5. 저자의 주된 견해

6. 2,3 에 대한 재반박

4. The Relations between Natural Philosophy and Theology in the Thirteenth century

176

1231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는 “학문의 어버이”(Parens Scientiarum)를 통하여 파리 대학에 학문의 자유를 인정했다.

177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금지령은 1255년 이후 무효화되었고,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대신 신앙의 기반을 흔들 수 있는 주장들에 부분적인 제제를 가하는 것으로 수정됨.

이후 일부 인문학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서를 의무화하기도 함.

1255년 이전에도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아리스토텔레스의 <Metaphysics>, <Physics>, <On Generation and Corruption> 등의 저서를 강의한 것으로 전해짐.

로저 베이컨은 자연철학의 논의에서 중요한 인물. 그는 신이 지혜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수학과 경험을 경시하여 철학이 쇠퇴한다고 믿었음.

177-

1270년부터 Stephen Tempier이 아리스토텔레스와 Averroes의 주해와 관하여, 그들의 추종자인 Siger of Brabant와 Boethius of Dacia를 비난함

예컨대 영원한 세계 및 자유의지를 결여한 지성인으로써의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영혼 등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비판한 뒤 이를 13조항에 포함하여 금지한 것

13조항의 영향력은 미미하였으나 신학의 교수진은 대신 1272년 인문학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연철학을 공부할 때 신학적인 문제 제기는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함

신학과 자연철학 간의 충돌이 발생한다면 신학을 우선순위에 두도록 강요하기도 함

178-

1268년과 1274년 사이에 에지디우스 로마누스(Giles of Rome)는 파리 대학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고 <Errors of the philosophers>를 집필함.

그의 목표는 아리스토테레스와 Averroes(12), Avicenna(22), Algazel(12), Allkindi(15) 그리고 Maimonides(15)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지적 중 여덟 개는 영원성과 관련되었고, 네 개는 신의 전지전능한 능력과 관련됨.

4.1. Tensions between the Faculties of Arts and Theology

179-

인문학부와 신학부는 각각 자연철학과 신학과 관련된 규율의 수호자 역할을 했으며, 특히 중세 시대에는 신학적 가치가 중시되었기 때문에 신학부의 교수진은 인문학부의 교수진보다 강력한 권력을 지녔음.

13세기의 신학자들은 신의 계시가 어떤 형태의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고 과학이나 자연철학과 같은 세속적인 배움은 신학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여겼음.

이에 성 보나벤투라는 신학을 과학의 여왕이라고 표현하기도 함.

그러나 인문학부의 교수진들은 이성을 통한 분석을 중시하는 자연철학이 우주를 이해하는 근본 학문이었고, 이것이 신학보다 부차적인 지위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음.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인문학부 교수들은 전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를 높게 평가했고, 1270년대 당시 이는 신학과의 긴장을 낳았음.

궁극적으로는 자연철학은 이들의 노력으로 신학으로부터 자율적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음.

4.2. The Condemnation of 1277

181-

신학자이자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일원이었던 에지디우스 로마누스의 <The Erors of the Philosophers>는 1260년부터 70년대 초까지 지성인들의 동요를 상징하는 단초가 됨.

이후 교황은 Stephen Tempier에게 프랑스의 이단적 견해에 대해 들었다며 상황 설명을 요구했고, 1277년 3월 Tempier 주교는 219개의 금지조항을 담고 있는 규탄서를 발표함.

계시가 배움의 장애물이 된다거나 철학적인 위계가 신학보다 높다는 등의 철학적 주장 중 어떤 것에 대한 옹호도 추방으로 연결됨.

그러나 219개의 금지조항은 급히 쓰여졌고, 상당한 내용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음.

일례로 세계의 영속성에 대한 항목은 27개의 조항에 중복됨.

금지 조항들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자연 철학의 두 가지 주제도 신의 절대성에 대한 한계와 논리적 모순, 그리고 세계의 영속성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임.

구체적으로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철학적 논의, 예컨대 신이 여러 개의 세상을 만들 수 없다거나 신이 새로운 행위나 사물의 원인이 될 수 없고, 그것들을 만들어 낼 수도 없다는 등의 주장들이 금지됨.

그 외에도 물리적, 우주론적 논의와 관련된 다양한 철학적 주장들이 금지됨.

Tempier 주교는 ‘철학에 부합하지만 신학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펼치며 두 가지 모순된 진리가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비난함.

특히 모든 문제를 이성을 통해 분석하려는 태도도 금지의 대상(145조)이 됨.

5. Is Theology a Science?

14세기 자연 철학에 미친 영향 신학과 자연철학의 근본 관계를 따져보면 Peter Lombard의 Sentence라는 12세기 신학 교과서에 드러남.

이 책의 서문에서 Lombard는 신학의 인식론적 성격이나 학문적 지위를 논하지만, 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그것이 과학인지 여부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을 연 것은 Alexander of Hales였음.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책 『신학대전』(Summa of Thelogy)에서 신학이 과학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논문의 첫 번째 질문에서 자연과 성역의 문제를 다룸.

즉, 성역의 문제도 과학에 속하지만 과학 자체가 두 가지 종류가 있음.

먼저 신학은 신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정당화할 수 있고, 다른 실용적인 과학보다 신학이 고차원적이고 이성으로 포착될 수 없는 영역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신학은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보는 것

그러나 신학이 자연 철학과 논리학, 과학 등을 사용했던 반면, 자연철학은 자연현상을 다룰 때 신학을 사용하지 않았고, 아퀴나스가 신학에 독립적 지위를 부여하려고 했던 시도는 오히려 자연 철학에 자율성을 부여하여 자연 철학에 상당 부분 의존하던 신학의 발전을 더디게 만드는 계기가 됨.

아퀴나스의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Physics) 주해를 통해 천당에 대한 논의나 역학 질서에 관하여 자연 철학과 신학을 분리하려고 노력함.

무에서 유로의 창조는 신성한 주제였기 때문에 자연 철학에서 논할 수 없는 주제라고 못 박은 것

아퀴나스도 이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됨.

요약하자면, 13세기는 14세기와 15세기에 과학과 종교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 세속적인 학문으로서의 과학과 신성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충돌을 빚은 첫 시기였고, 둘의 관계는 신학 권력이 인문학자들을 제압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나, 두 학문의 비-대칭적 의존관계는 7장에서 논의되듯이 14-15세기에도 이어짐.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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