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4

제30주기 김귀정 열사 추모제



올해 김귀정 열사 추모제는 30주기여서 그랬는지, 예년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열사 추모제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은 처음 본 것 같다. 코로나19 때문에 좌석을 100석만 준비했는데, 의자에 앉은 사람보다 일어서 있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입구 근처에 책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열사 추모제 참석자들은 차례대로 체온을 측정하고 방명록을 작성하고 이름표를 받았다. 원래는 이름표를 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 코로나19 때문에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서로 누구인지 확인하라고 이름표를 준 것 같았다. 이름표를 목에 걸고 가려고 하니 책상에서 일을 보던 분이 나를 불러서 쇼핑백을 가져가라고 했다. 쇼핑백 안에는 『김귀정 열사 30주기 추모집』 한 권과 김귀정 열사의 친필을 새겨 넣은 만년필 한 자루가 있었다.

김귀정 열사의 묘소 앞에는 햇볕을 막는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밑에 의자를 깔아놓았다. 맨 앞줄에는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가 앉아계셨고 그 옆으로 강경대 열사의 부모님 등이 앉아계셨다. 나와 일행들은 뒷줄에 의자에 앉았다. 참석자들이 계속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에 보니 머리가 하얗고 키가 훤칠한 노인이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께 인사하고 반갑다고 하며 포옹했다. 이름표가 뒤집혀 있었지만 얼굴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장기표 선생이었다. 장기표 선생은 1991년 당시 장례 집행위원장이었다. 잠시 뒤에는 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왔다. 박용진 의원은 의자에 앉아계신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어머니, 저 용진이에요. 저도 많이 늙었죠?” 하면서 인사했다.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는 “아이고, 용진이 왔구나” 하면서 반가워하고 다른 열사의 부모님들은 “아이고, 용진이가 대통령 선거 나간다며?”, “대통령 선거 나가야지”라고 했다. 잠시 뒤에는 민주당 기동민 의원이 와서 의자에 앉아계신 열사의 어머니를 포옹했다.

그러는 동안 내 옆자리에 어떤 아저씨가 조용히 와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름표에 ‘장준환’이라고 써있었다. 장준환? 영화 <1987>의 장준환 감독? 동명이인이 아닐 것 같기는 했는데 정말 장준환 감독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네이버에서 사진을 검색하려고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런데 저 아저씨가 바로 옆에 있으니 내가 네이버에 ‘장준환’이라고 검색하면, 그것을 저 아저씨가 볼 것 같았다. 그러면 저 아저씨 눈에 내가 촌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뒤편에 가서 혼자 조용히 검색해보았다. 마스크를 써서 눈과 머리밖에 안 보였지만 장준환 감독이었다. 장준환 감독은 추모제가 진행되는 동안 혼자서 조용히 앉아 있다가, 행사가 끝나고 묘소에 헌화한 뒤, 단체 촬영할 때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조용히 인사했다.

추모제 행사가 시작되고 내빈 소개가 간단히 진행되었다. 맨 먼저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를 소개했다.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참석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와 줘서 고마워요, 고맙습니다”라고 하다가 곧바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서는 소리내어 우셨고, 옆에서 다른 열사의 부모님이 어깨를 두드리고 다른 사람이 손수건을 가져왔다. 사회자는 하늘에 뭐가 지나가지도 않는데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졸업생 추모사를 전국철도노조위원장이 했다. 1991년 5월에 사수대를 했다고 한다. 매년 추모제에 왔는데, 처음에는 울분에 차서 오다가 언제부터인가는 열사를 추모하러 오다가 언제부터는 사람들을 만나러 온다고 했다. 15년 동안 해직노동자로 지내던 이야기,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가 자신을 걱정해주었다는 이야기, 대기업 노조에 대한 기대와 우려도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그러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 이제는 세상이 좋아져서 파업해도 감옥에도 안 가고 잘리지도 않아요. 이제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그 뒤로 추도사를 두 분이 더 하셨는데, 한 분은 1991년 5월에 영안실에서 가스통을 틀어놓고 지키던 이야기를 했고, 다른 한 분은 담담하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했다.

세 사람의 추모사가 끝나고, 김귀정 열사의 조카가 할머니께 편지를 읽어드리는 것을 했다. 손녀가 편지를 읽을 때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가 또 우셨다. 그 날은 그렇게 두 번 우셨다. 손녀가 편지를 읽고 나서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께 감사패를 전달했다. 열사의 어머니는 계속 우셨다. 1991년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민주당 기동민 의원은 올해도 “어머니, 100살까지 사시면 제가 사비로 100살 잔치해드릴게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라고 했다. 매년 열사 추모제 때마다 하는 이야기라서 한 열 번쯤 들은 것 같다. 기동민 의원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는 “아유, 너희들 덕에 내가 오래오래 살아서 100살 잔치까지 할 텐데 동민이는 큰일 났네!”라고 하셨는데, 올해는 우시느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못했다.

내가 추모제에 참석하기 전에 약간 걱정했던 것이 있었다. 올해는 이상하게도 1980년 5월이든 1991년 5월이든 이상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유명 시사만화가는,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가 딸의 영정을 끌어안고 울고 있고 영정 속의 김귀정 열사가 “엄마, 이번 대선 잘 치러서 제가 다시 죽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내용의 신문 만평을 그리기도 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추모제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혼자서 했다. 그런데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예년보다 참석자가 몇 배 많았지만 그런 너절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모제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심지어 민주당 의원조차도 그런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202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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