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6

그렇지만 차유람이라면



며칠 전, 지도교수님과 전공자들이 저녁식사를 했다. 어느 학교가 파산 위기라더라, 강사법 시행 이후에 학교들이 강사 수를 줄이고 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강사 자리가 줄어든다는 이야기에 선생님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〇〇이가 수료할 때쯤에 강의할 자리가 있을까 모르겠네”라고 하셨다. 나는 “어떻게 되겠죠”라고 답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석사과정생이 큭큭 웃으면서 “관악구청 같은 데 가면 되잖아요”라고 했다. 나는 석사과정생에게 선생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어차피 선생님도 아시잖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사실, 관악구청 같은 데 가면 된다. 대외적으로 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아르바이트가 간간이 들어오니까 본격적으로 영업하면 당연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학술지에 멀쩡히 논문이라도 쓰는 것도 아니라서 지도교수 앞에서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그렇다. 그런데 선생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왜? 강신주처럼 잘 될 수도 있잖아.” 그 말에 나는 곧바로 “돈을 많이 벌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추하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물론, 개 같이 벌어 정승처럼 쓸 수도 있다. 나는 예전에 인문대 출신의 어느 고액 기부자가 인문대 교수들 앞에서 인문학 강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는데도 강연장에 있던 인문대 교수들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강연자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가지고 한참이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을 때, 나는 근세철학 선생님의 반응을 살폈다. 놀랍게도 그 선생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 해당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분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나는 ‘돈이란 저런 것이구나, 나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인문대에 거액을 기부하고 협동과정에 전 지도교수 이름을 딴 장학금을 만들고 학회에 현 지도교수 이름을 딴 상을 만든다면, 내가 개소리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학계에서 아무도 나를 욕하거나 등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정상적인 대학원을 다녀놓고는 개소리해서 추하게 돈 벌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돈 벌면 돈만 많이 벌 수 있는데, 개소리로 돈 벌면 돈도 많이 벌고 차유람 같은 부인과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돈은 많지만 지도교수가 모르는 척하고 동료들이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래도 부인이 차유람이다? 어쩌면 나는 “R=VD에서 V가 곱이 아니라 제곱”이라고 하거나 “R=VD를 미분하면 순간실현률이 나온다”고 하거나 “marginal VD이 0이 되는 지점에서 total VD가 극대화되니까 더 이상 생생하게 꿈꿀 수 없을 때까지 꿈꾸라”고 하거나, “R=VD이 아니라 R=αVD+β”라고 하고 α값과 β값을 구할지도 모르겠다.

(2019.05.26.)


댓글 2개:

  1.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고 싶은 사람입니다.
    킬링 포인트가 확실하군요. '그런데 부인이 차유람이다.' ㅋㅋㅋㅋㅋ
    재밌게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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