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 판본
Oxford에서 출판한 Oxford World’s Classics 시리즈 중 하나인 『Anselm of Canterbury – The Major Works』 260~356쪽
한국어 판본
『인간이 되신 하나님』, 안셀무스 지음, 이은재 옮김, 한들출판사 펴냄 ]
1장. 인간은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안셀무스의 논증 - 인간이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1)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유하는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이성적인 존재의 본성을 의로운 것으로 창조했다.
(1) 인간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의와 불의, 선과 악, 더 큰 선과 보다 작은 선을 구별할 수 있다.
(2) 그렇지 않다면 그것[인간]이 이성적으로 창조된 의미가 없다.
(3) 하느님이 아무런 목적 없이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하지 않았다.
(4)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 목적을 위해서 그들을 이성적으로 창조했다.
2) 이성적인 본성에는 분별력이 주어져서 악을 미워하고 피하며 선을 사랑하고 선택할 수 있으며 더 큰 선을 보다 사랑하고 섬기게끔 했다.
(1) 인간이 사랑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가려내는 않는다면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 자체는 무의미할 것이다.
(2)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람에게 분별력을 준 의미가 없다.
(3) 하느님이 그렇게 중요한 능력을 쓸모없이 준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
(4) 그러므로 이성적인 본성에는 분별력이 주어져 있다.
3)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이 다른 것보다 가장 높은 선인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섬기도록 창조되었다.
(1) 인간이 어떤 것을 위하여 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선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2) 인간이 의롭지 않고는 가장 높은 선을 사랑할 수 없다.
(3) 인간은 의로운 상태에서만 선을 사랑할 수 있다.
(4) 그러므로 인간이 이 목적을 위하여 의로우면서도 이성적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면 인간이 이성적인 것에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4) 이성적인 존재는 가장 높은 선인 하느님 안에서 향유함으로써 복을 얻게끔 창조되었다.
(1) 인간이 가장 높은 선을 선택하고 사랑하게끔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인간은 그가 사랑하고 선택하는 것에 도달하거나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2) 이성적인 본성이 자신이 사랑하고 선택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되이 창조된 것이다.
ⓐ 왜냐하면 인간은 가장 높은 선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창조되었지만 인간이 왜 하느님에게 도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인간이 가장 높은 선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의롭게 행한다 해도, 인간이 그가 갈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그의 의지에 상반되고 추구하는 것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다.
(3) 하지만 이[하느님이 헛되이 창조하는 것]는 터무니없다.
5) 그러므로 이성적인 본성은 가장 높은 선을 향유하며 행복하기 위하여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제2장.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는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안셀무스의 논증 -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1) 인간을 의로운 상태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2) 인간이 아무 잘못 없이 죽음을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하느님의 지혜와 정의에 어긋난다.
3) 그러므로 인간이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들은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제3장. 인간은 현세에 살던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다
<안셀무스의 논증 – 인간을 현세에 살던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다>
1) 인간이 완전히 회복되어야 한다면 죄를 짓지 않았을 때의 상태로 회복되어야 한다.
2)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의 몸은 썩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3)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미래에 부활할 때 그는 현세의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다.
<보소의 질문>
버려질 사람도 현세의 몸을 가지고 부활하는가?
<안셀무스의 답변>
사람이 의로움을 끝까지 지키면 그는 그의 완전한 존재(영혼과 몸)를 모두 영원히 즐거움을 누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비참할 것이다.
제4장. 하느님은 그가 시작한 인간 본성에 관한 일을 완수할 것이다.
<안셀무스의 논증 - 하느님은 자신이 시작한 인간 본성에 관한 일을 완수할 것이다.>
1) 하느님이 시작한 일을 완성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창조한 본성은 헛된 것이다.
2) 하느님은 이성적인 존재보다 더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았다.
3)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성적인 존재가 완전히 멸망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4) 하느님이 자신이 시작한 일을 이루는 것은 필연적이다.
5) [하느님은 자신이 시작한 인간 본성에 관한 일을 완수할 것이다.]
<안셀무스의 부연설명>
하지만 하느님이 시작한 것이 완성되려면 어떠한 죄인도 갚을 수 없는 죄에 대한 완전한 보상이 치러져야 한다.
제5장. 이는 필연성의 강요로 일어나지 않는다; 감사함을 없애거나 줄이는 필연성이 있고 감사함을 증가시키는 필연성이 있다
<보소의 문제제기 - 하느님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1) 하느님이 실패를 피하기 위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마치 그 일을 억지로 강요받아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2)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3) 우리는 하느님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안셀무스의 논증 – 하느님의 필연성은 감사하는 마음을 증가시키는 필연성이다.>
1) 필연성에는 감사하는 마음을 없애거나 감소시키는 필연성과 이와 반대로 감사하는 마음을 증가시키는 필연성이 있다.
2) 감사하는 마음을 없애거나 감소시키는 필연성은 불가피한 외부의 힘 때문에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은혜를 베푼 경우다.
3) 감사하는 마음을 증가시키는 필연성은 그가 스스로 필연적으로 선한 일을 하도록 힘쓰는 것으로 강요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필연이 아니라 은혜로운 행위다.
(1) 오늘 선물을 주겠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하고 그 다음날 실제로 선물을 준 경우
ⓐ 약속을 어긴다면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점에서 약속을 지키는 것은 필연적이다.
ⓑ 선물을 주기 전부터 선물을 줄 사람에게 스스로 채무자가 된 것이므로 은혜를 베푼 것이다.
(2) 수도승으로 살기로 한 경우
ⓐ 배교자라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서약을 지킨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다.
ⓑ 기꺼이 수도승으로 살겠다고 하는 경우라면 평범한 삶을 살 자유까지 포기한 것이기 때문에 필연성에 의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서약할 수 있었던 자유로 그렇게 한 것이다.
4) 하느님이 수행하는 일은 감사하는 마음을 증가시키는 필연성이다.
(1) 하느님은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으니, 그가 시작한 일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한 것이다.
(2) 하느님이 인간에게 의무를 지운 것은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3) 하느님이 수행하는 일은 실패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4) 하느님이 어떠한 일을 필연적으로 한다고 할 때 하느님의 변하지 않는 영광[하느님 자신이 소유한 것이며 다른 것이 아닌 영광을 보존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6장.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인간 밖에 없다
<안셀무스의 논증>
1)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밖에 없다.
(1) 하느님의 일이 완성되려면 하느님을 제외한 나머지 존재하는 모든 것보다 더 큰 것을 바쳐야 한다.
(2) 하느님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보다 큰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보다 더 큰 존재이어야 한다.
(3) 하느님을 제외하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보다 우월한 존재는 없다.
(4) 따라서 하느님만이 대가를 치를 수 있다.
2)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인간이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1) 의무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인간이 치러야 한다.
(2) 인간이 하지 않으면 자기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다.
3)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하느님-인간이 필요하다.
(1) 천상의 도시를 인류가 채워야만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2)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대가가 치러지지 않을 수 없다.
(3) 하느님만이 보상을 할 수 있고 하느님만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4) 그러므로 하느님-인간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7장. 완전한 하느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인 하나이고 동일한 인격은 필연적이다
<안셀무스의 논증>
1) 하느님인 동시에 사람인 존재가 가능하다.
(1) 신적인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서로 바뀔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인간이 되거나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다.
ⓐ 하느님이지만 사람은 아닌 존재
ⓑ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아닌 존재
(2)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혼합되어서 완전히 신적이지 않고 완전히 인간적이지도 않은 제3의 본성이 만들어질 수도 없다.
ⓐ 하느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제3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나온다.
2) 완전한 하느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인 하나의 동일한 존재이어야 한다.
(1)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서로 구분되는 방식으로 결합하면 안 된다.]
ⓐ 한 인격이 인간이고 또 다른 인격이 하느님이면 한 인격체가 하느님인 동시에 인간일 수 없다.
ⓑ 하느님은 빚을 지지 않았고 사람은 부채를 갚을 능력이 없다.
(2) 이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인격체는 완전한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인 하나의 동일한 존재이다.
3)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완전하게 보존하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인 동시에, 두 완벽한 본성들이 한 인격 안에서 만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제8장. 하느님은 아담의 혈통과 처녀에서 인간의 본성을 취해야만 한다
<안셀무스의 논증>
1) 하느님은 아담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취해야 한다.
(1) 새로운 인간 존재에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면 안 된다.
ⓐ 아담의 혈통이 아니면 죄를 저지른 혈통이 아니다.
ⓑ 죄를 저지른 혈통이 아니면 죄의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
(2) 아담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 아담에게서 죄가 시작되었으니 아담의 후손이 죄를 끊어야 한다.
ⓑ 다른 혈통의 도움을 받아 회복된다면 아담은 다른 혈통에게 빚을 지게 되어 완전하게 회복될 수 없다.
ⓒ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여성도 아담에게서 창조하기로 한 것은, 아담 한 사람에게서만 인간본성을 창조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2) 하느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야 한다.
(1)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는 방식은 네 가지다.
ⓐ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서 취하는 방식 – 개별 인간
ⓑ 남자와 여자 어느 누구에게서도 취하지 않는 방식 - 아담
ⓒ 여자 없이 남자에게서만 취하는 방식 - 이브
ⓓ 남자 없이 여자에게서만 취하는 방식
(2) 남자 없이 여자에게서만 취하는 방식이 적절하다.
ⓐ 두 성이 섞이는 것보다 한 성에서 나오는 것이 순수하고 영광스럽다.
ⓑ 인간을 만드는 방식 중에 남자와 여자를 모두 통하는 것, 남자와 여자 어느 누구도 통하지 않는 것, 여자 없이 남자만 통하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으므로, 하느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네 번째 방식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이것이 필요하다.
(3) 남자 없이 여자에게서만 취하는 방식에 대한 부연설명
ⓐ 인간의 죄의 원인이 여자이므로 여자의 희망을 회복하기 위해 여자에게서 선이 나와야 한다.
ⓑ 인간의 모든 악의 원인이 처녀이므로 모든 선함의 원인도 처녀에게서 나와야 한다.
ⓒ 여자 없이 남자에게서 만든 여자는 동정남에게서 창조되었으므로, 남자 없이 여자에게서 만든 남자는 동정녀에게서 창조되어야 한다.
제9장. 오직 말씀과 인간이 단일한 인격에서 결합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안셀무스의 논증>
1) 성부나 성령의 위격이 성육신하면 안 된다.
(1) 다른 위격이 성육신하면 삼위일체 안에는 두 아들이 존재한다.
ⓐ 성육신 이전부터 아들인 하느님의 아들과 성육신을 통해 동정녀의 아들인 하느님의 아들
ⓑ 위격은 동등해야 하는데 출생이 구분되면 차등이 생긴다.
(2) 말씀이 성육신해야 한다.
ⓐ 성부가 성육신하면 두 손자가 있게 되는데, 성부는 동정녀의 부모의 손자가 되고 말씀은 동정녀의 손자가 되고, 이는 적합하지 않다.
ⓑ 말씀이 성육신하면 이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2) 성자가 성육신하는 것이 적합하다.
(1) 성자가 성부에게 기도하는 것은 다른 위격이 다른 위격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적합하다.
(2) 성자는 인간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또한 악마를 정복해야 한다.
ⓐ 인간과 악마 모두 하느님 같이 되려는 거짓을 했다.
ⓑ 성자는 성부의 참된 모상이므로, 인간과 악마는 성자의 위격에 대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죄를 지었다.
ⓒ 이와 같은 잘못에 대하여 처벌이나 용서를 하는 것은 성자가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제10장. 예수에게 죽음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가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예수와 천사는 죄를 지을 수도 없는데 그들의 의로움은 왜 찬양받아야 하는가?
<안셀무스의 주장>
예수는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죄가 없고 따라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보소의 문제제기(1) - 예수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1) 예수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1) 예수는 거짓말 할 수 있다.
ⓐ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성부에 대해 말하며 “내가 그분[성부]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는 너희들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 예수는 “나는 그분[성부]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다.
(2) 거짓말하는 것은 죄다.
<안셀무스의 논증(1) - 예수는 거짓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거짓말 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없다.>
1) 모든 능력은 의지에 달려 있다.
(1) 의지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는 필연성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 내가 말하거나 걸을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만약 내가 원한다면”으로 이해된다.
2) 내가 나의 의지에 반하여 지배되거나 정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강요이며 능력이다.
(1) “나는 목숨을 빼앗길 수 있거나 정복될 수 있다”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나의 목숨을 빼앗거나 나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3) 그리스도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동시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거짓말을 할 능력이 있었지만 거짓말을 할 의지가 없었다].
(1) “그리스도가 의지한다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2)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거짓말을 할 수 없다.
(3) 그리스도는 거짓말 하는 것을 의지할 수 없었다.
(4) 그리스도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보소의 문제제기(2) – 예수의 의로움은 자유의지가 아닌 필연의 결과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
1) 예수가 의로움을 유지하는 것은 필연의 결과이지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1) 예수가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죄 짓는 것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천사와 예수를 찬양하는 이유는 그들의 자유의지 때문이다.
(1) 천사와 예수는 의로움을 버릴 수 있었지만 자유의지로 의로움을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찬양한다.
3) 그러므로 그들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안셀무스의 논증(2) - 하느님의 의로움은 필연성이 아닌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
1) 천사들이 의롭다고 찬양받을 수 있다.
(1) 천사가 죄를 짓지 않는 현재의 능력을 그들 자신에서 소유하게 되었다.
ⓐ 어떤 사람이 무엇을 버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준다고 할 수 있고, 무엇인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막지 않는 것은 그것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 천사는 스스로 의를 버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천사는 그 자신에게 의로움을 주었고 그 자신을 의롭게 했다.
ⓓ 피조물은 의로움을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 소유할 수 없다.
(2) 천사가 의롭게 된 것은 필연성 때문이 아니다.
ⓐ 어떠한 강요나 억제가 없기 때문에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2) 천사가 의로움 때문에 찬양받을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도 의로움 때문에 찬양받을 만하다.
(1) 하느님이 소유한 것은 무엇이나 자신에게서 온 것이다.
(2) 하느님의 품성들은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하고 영원한 불변성에 의한 것이다.
(3) 하느님의 모든 선함은 필연성이 아니라 자유에 의하여 갖고 있다.
(4) 하느님이 소유하는 인간의 모든 본성은 자신에게서 온 것이다.
ⓐ 하느님이 소유하는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의 본성 덕분이지만, 두 본성이 한 인격을 이루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서 온 것을 소유했다고 할 수 있다.
<보소의 문제제기(3)>
왜 하느님은 천사와 아담, 이브를 죄 지을 가능성이 없으면서 의로운 존재로 만들지 않았는가?
<안셀무스의 논증(3)>
하느님은 인간을 신의 위격만큼 많게 또는 적어도 그들 중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하느님은 아무 이유 없이 하는 일이 없다.
제11장. 예수의 죽음은 그의 능력에 의한 것이며, 사망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보소의 질문>
예수가 진정으로 사람이고 모든 사람은 본성에 따라 죽어야 한다면, 예수는 본성에 따라 죽어야 하지 않는가?
<안셀무스의 논증(1) - 예수는 전능자이므로 필연성에 의해 죽은 게 아니다.>
1) 사망은 타락한 인간의 속성이고 순수한 인간의 본성에는 속하지 않는다.
(1)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고 사람의 불멸성이 확정된 것이었다고 해도 예수는 사람일 것이다.
(2)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도 그들은 사람일 것이다.
ⓐ 만일 사망이 인간 본성에 속한다면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사람이니 사망은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3) 타락함은 인간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 타락함이나 타락하지 않음은 모두 인간을 만들거나 파괴하지 않는다.
ⓑ [어떤 것의 상태에 적용되는 것은 그것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 타락함은 인간이 비참해진 상태에 적용되고 타락하지 않음은 인간이 행복한 상태에 적용된다.
2) 예수가 다른 사람에게 죽고자 한다면 죽을 수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하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1) 만일 예수가 하느님이라면 그 역시 전능자이다.
(2) 전능자는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다시 취할 수 있다.
ⓐ 다른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 생명을 버리든 다른 사람의 개입을 통하여 생명을 버리든 예수의 능력에 관하여는 차이가 없다.
<안셀무스의 논증(2) - 예수는 의무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지로 죽었다.>
1) 예수는 하느님에게 빚진 것을 갚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어떤 것을 바쳐야 한다.
(1) 예수는 하느님 아래 있는 모든 것보다 큰 것을 소유해야만 한다.
(2) [예수가 하느님에게 바칠 것을] 하느님의 아래에서나 밖에서 찾을 수 없다.
(3) [예수가 하느님에게 바칠 것을] 예수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4) 예수는 하느님에게 자기 자신을 바치거나 자신에게 속한 것을 바쳐야 한다.
2) 예수는 하느님에게 순종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나 자신에게 속한 것을 바친 것이 아니다.
(1) 하느님에게 순종하기 위해 바치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2)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은 하느님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3) 예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거나 영혼을 내어주거나 자신을 죽음에 넘겨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1) 하느님은 채무로 예수의 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 예수는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된다.
(2) 하느님에게 채무자가 하는 방식이 아닌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바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4)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에게 가장 완전히 바치는 것이다.
(1) 인간이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죄를 지었으므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2) 죄를 지어 하느님에게서 자기 자신을 가능한 한 멀리 빼앗아 갔으므로 가능한 한 완전히 하느님에게 자기 자신을 바쳐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3) 인간이 채무가 아닌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겪을 수 있는 일 중 가장 힘든 것은 죽음이다.
5)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하는 예수는 그가 원한다면 죽을 수 있는 속성을 가져야 한다.
제12장. 예수는 우리의 고난을 나누지만 불행하지 않다
<안셀무스의 논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소유하는 이득은 그 사람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듯이, 자발적이고 현명하게 그리고 다른 강요 없이 받아들이는 고난은 그 사람에게 불행을 주지 않는다.
제13장. 예수는 우리의 약함은 가졌지만 무지함은 가지지 않았다
<안셀무스의 논변>
1) 예수는 인간 안에 있는 쓸모없고 해가 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1) [누군가 어떤 것을 지혜롭게 받아들인다면 쓸모 있거나 이로운 것만 받아들이고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2) 하느님이 인성을 받아들여 위격을 결합하는 것은, 가장 높은 지혜에 의해서 현명하게 이루어진다.
2) 예수에게 무지는 쓸모없고 해롭다.
(1) 지혜가 없다면 그 많고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없다.
(2) 예수가 무지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을 것이다.
(3) 예수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없듯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선으로 줄 수 없다.[예수는 모든 선한 것을 사랑하고 안다.]
ⓐ 악에 대해 무지한 사람은 선과 악을 온전히 구분할 수 없다.[예수는 악을 완벽하게 안다]
ⓑ 선과 악을 온전히 구분할 수 없다면 선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예수는 선을 완벽하게 안다.]
3) [예수는 인간의 무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 지혜가 자리 잡았냐는 보소의 물음에 대한 안셀무스의 답변>
예수가 사람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항상 그는 자기 자신인 것처럼 온전한 하느님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하느님의 힘, 능력, 지혜가 충만하다.
제14장. 예수의 죽음은 모든 죄의 수와 크기를 능가한다
<보소의 질문>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모든 죄의 수와 크기를 능가하는가? 하느님의 의지에 반하여 반대편을 본 것 같은 가장 가벼운 죄도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안셀무스의 논변>
1) 예수의 생명은 다른 죄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선하다.
(1) 모든 선은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 악한 만큼 선하다.
(2) 예수의 인격에 가하는 죄는 그의 인격에 가하지 않는 다른 모든 죄보다 무겁다.
ⓐ 사람은 자기 재산에 손상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상해 입는 것을 감수할 수 있다.
ⓑ 하느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 아래 복종시키기 때문에 자신이 상해 입을 필요가 없다.
(3) 예수를 살해하는 것은 매우 무거운 악이다.
2) 예수의 생명이 그 죄들을 위한 대가로 주어지면 모든 죄를 극복할 수 있다.
(1) 예수의 생명의 선함이 온 세상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에 충분하다.
(2) 생명을 바치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3) 예수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은 인류의 모든 죄의 무게를 능가한다.
제15장. 이 같은 죽음은 예수를 죽게 한 사람들의 죄까지도 없앤다
<보소의 질문>
예수의 생명이 선한만큼 예수를 죽이는 것이 악하다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의 죄는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만약 예수의 죽음이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의 죄를 씻어준다면 어떻게 그 죽음이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씻을 수 있는가?
<안셀무스의 논변>
1) 예수를 죽인 사람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1) 모르고 저지른 죄는 알고 저지른 죄보다 가볍다.
ⓐ 모르고 저지른 죄는 그 죄가 어떤 죄인지 알았다면 저지르지 않았을 죄이다.
ⓑ 모르고 저지른 죄의 원인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무지함에 있다.
(2)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예수가 하느님인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죽인 것이 아니다.
ⓐ 어떤 사람도 하느님을 의도적으로 죽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 [14장에서]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일부러 예수를 죽였다고 가정한 것은 예수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파악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3) 모르고 저지른 죄는 끝없이 커다란 죄로 치닫지 않는다.
제16장. 하느님은 어떻게 죄 있는 질료에서 죄 없는 사람(예수)을 만들었는가, 또한 아담과 이브의 구원에 관하여
<보소의 질문>
하느님은 죄에 물들어있는 인류에서 어떻게 죄 없는 인간(예수)을 만들었는가?
<안셀무스의 답변>
예수가 행한 구원의 효력은 예수가 살던 당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시대의 사람에게도 미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효력이 매우 강해서 다른 지역이나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왕의 비유]
어떤 도시에 왕이 있었다. 그가 다스리는 사람 중 한 사람만 빼고 모두 그 왕에게 반역죄를 지어 사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죄 없는 사람이 죄인들을 매우 사랑하여 자신의 계획을 믿고 따르는 사람과 왕을 화해시키려고 한다. 그 계획은 왕이 정한 날에 죄 없는 사람이 왕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해서 왕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왕의 용서를 받게 하는 것이다.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정해진 날 모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왕은 죄 없는 사람이 한 일의 위대함을 감안하여, 그날 이전이든 이후든 그날 이루어진 행위를 통하여 왕의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은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주기로 협정을 맺었다. 용서받은 사람들이 다시 죄를 지어도 그들이 다시 용서를 구한다면 그 협정의 효력으로 그들을 다시 용서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왕의 궁전에 들어갈 수 없다.
<안셀무스의 논변(1) -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1) 예수의 죽음은 그때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서는 안 된다.
(1) 예수가 죽을 때 당시 어딘가에 살던 모든 사람이 그의 구원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들은 천상의 도시를 구성할 사람들보다는 적었다.
(2) 예수가 죽을 때 이 땅에 사는 구원의 수를 채우게 될 사람 수보다 마귀의 수가 더 많았다.
2) 하느님은 천상의 도시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인류나 그들이 사용하는 사물들을 한순간도 헛되이 놓아두지 않는다.
(1)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천상의 도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2) 창조된 목적에 부합하지 않은 것은 헛되이 존재하는 것이다.
ⓐ 인간이 자신이 창조된 목적에 부합하지 않다면 하느님은 인간을 헛되이 창조한 것이다.
(3) 하느님이 피조물을 헛되이 창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4) 인간이 창조된 이후로 예언된 회복에 참여하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3) 아담과 이브도 이 구원[천상의 도시를 완성하는 것]에 참여한다.
(1)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할 때 하느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들 속에 포함시키려고 그들을 만들었다.
ⓐ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고 그들로부터 천상의 도시로 데려올 모든 사람이 태어나게끔 지속적으로 결심을 했다.
ⓑ 하느님의 계획에서 두 사람이 제외되었다고 믿을 수 없다.
4) [아담과 이브를 포함하여 그 이후의 사람들도 구원받는다.]
<안셀무스의 논변(2) - 예수의 죽음이 동정녀 마리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예수를 낳은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예수를 통하여 죄에서 씻어진 사람에 속하며,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한 상태에서 태어났다. 예수의 어머니의 순결성은 예수에게서 유래하기 때문에 예수는 자기 자신에 의하여 순결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순결하다.
<보소의 논변 - 예수의 죽음이 동정녀 마리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필연적이다.>
1) 예수의 어머니는 미래에 일어날 예수의 죽음을 통해 순결하게 되었다.
(1)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가 반드시 죽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에 순결하게 되었다.
2) [예수가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있지 않았다면 동정녀 마리아는 순결해질 수 없다.]
3) 예수의 어머니가 순결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태어날 수 없었다.
4) 예수가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있지 않았다면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수 없다.
5) 그러므로 예수는 필연적으로 죽어야 한다.
<안셀무스의 논변(3) - 예수의 죽음은 필연적이지 않다.>
거짓말
생명 보존
의지
거짓말을 하려는 의지
생명을 보존하려는 의지
능력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능력
1) 예수는 항상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능력이 있다.
2)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의지를 가질 수 없었다.
3)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4) 이는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안셀무스의 논변(3)’에 대한 보소의 반박>
거짓말 하는 능력과 생명을 보존하는 능력은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예수가 거짓말하기를 원했다면 그는 거짓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예수가 사람이 된 목적은 죽는 것인데, 예수가 미래에 죽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수 있었다.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 있지 않았다면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수 없었다.]
이 경우 죽는 것과 죽기를 원하는 것은 모두 이성적으로 볼 때 똑같으며 둘 다 그에게는 필연적으로 내재한다.
<안셀무스의 논변(4) - 예수의 죽음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1) 하느님의 의지는 어떤 것을 필연적으로 행하며, 어떠한 필연성에도 강요받지 않으며 그자체로 고유한 자발적인 불변성을 지속한다.
(1) 하느님의 변하지 않는 의지는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2) 예수의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다.
3) 예수는 자발적이고 변하지 않는 의지에 따라 반드시 죽고자 했다.
(1) 예수는 죽기 전에 죽으려는 의지를 가졌다.
(2) 예수의 의지는 자발적이고 변하지 않는다.
4) 예수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실제로 죽었다.
5) 예수는 필연성에 의해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죽었다.
제17장. 하느님에게는 어떠한 필연성이나 불가능이 존재하지 않으며, 필연성 중에는 강요에 의한 필연성과 강요 없는 필연성이 있다.
<안셀무스의 논증(1) - 모든 필연성이나 불가능성은 하느님의 의지에 종속된다.>
1) 모든 필연성이나 불가능성은 하느님의 의지에 종속되며, 하느님의 의지는 어떠한 필연성이나 불가능성에 속박 받지 않는다.
(1) 하느님이 행위와 행위하지 않음, 의지함과 의지하지 않음에 선행하는 필연성이나 불가능성은 없다.
ⓐ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제외하고 필연적인 것이나 불가능한 것은 없다.
ⓑ 하느님은 원하는 모든 일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한다.
ⓒ 하느님이 무엇인가를 행할 때, 그 일이 이루어졌다면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었던 것이며,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은 참이 된다.
ⓓ 하느님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의 일이 되도록 할 수 있다.
(2) 하느님의 의지만이 활동한다.
ⓐ 하느님이 어떠한 일을 하기로 불변의 결정을 하면,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일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어떠한 환경이나 상황도 하느님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끔 만들 수 없다.
ⓒ 이는 하느님이 어떠한 일을 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2) 하느님 속에 어떠한 필연성이 있어서 그가 어떠한 일을 필연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속에 필연성이 있기 때문에 그가 그 일을 필연적으로 한다.
(1) 어떠한 일이 그 자체 속이 아니라 다른 것 속에 능력이 있어서 그 일이 가능하거나, 어떠한 일이 그 속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것 속에 능력이 부족해서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 “이 사람은 정복될 수 있어”라는 말은 “누군가가 이 사람을 정복할 수 있어”라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는데, 이때 정복을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은 능력이 아니라 능력의 결핍이다.
ⓑ “그 사람은 정복될 수 없어”라는 말은 “그 누구도 그를 꺾을 수 없어”라는 뜻인데, 이때 정복당할 수 없는 불가능성은 능력의 결핍이 아니라 능력이다.
(2) 모든 필연성은 강요에 의한 필연성이거나 방해에 의한 필연성이며, 두 가지 필연성은 필연성과 불가능성처럼 서로 대립된 채 교환된다.
ⓐ 무엇이든지 존재하도록 강요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방해받는 것이다.
ⓑ 무엇이든지 존재하지 못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존재할 가능성을 방해받는 것이다.
ⓒ 필연적으로 존재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3) 하느님은 필연적으로 항상 진리만을 말하며,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다.
ⓐ 하느님 외의 다른 모든 것 속에는 하느님에 상반되는 어떠한 일도 못하게 방해하고, 그렇게 되게끔 강요하는 필연성이 있다.
ⓑ 어떠한 것도 하느님이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하거나 거짓말하게 할 힘이 없다.
3) 예수는 의지의 불변성에 따라 기꺼이 사람이 되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 결정을 지속하여 죽었다.
(1) 어떤 것도 예수의 의지를 바꿀 수 없었다.
(2) 예수가 거짓말을 하거나 불변적인 그의 의지를 번복한다면, 그것은 능력이 아니라 무능력이다.
(3) 어떤 일을 강요나 무능력과 관계없이 오직 의지만으로 행할 때, 우리는 그 일이 강요나 무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안셀무스의 논증(2) - 예수의 의지에 선행하는 필연성은 없으며 후행하는 필연성만 있다.>
1. 동정녀 마리아의 참된 믿음은 예수가 자발적으로 죽은 원인이 아니다.
(1) 예수의 죽음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믿음이 참이다.
(2) “예수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죽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을 예견한 신앙이나 예언이 참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이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일어날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3) 이러한 종류의 필연성은 어떠한 일이 존재하도록 강요하지 않으며, 반대로 어떠한 일의 존재가 그 필연성을 불러일으킨다.
2) 존재의 원인이 되는 선행하는 필연성과 어떤 것의 존재에 의하여 생겨나는 결과적인 필연성이 있다.
(1) 하늘이 회전한다고 할 때, 그것이 선행하며 유효한 필연성을 갖는 것은 하늘이 필연적으로 회전하기 때문이다.
ⓐ 이는 하늘의 자연적인 상태의 힘이 하늘을 회전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2) 내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필연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어떠한 것에도 효력을 미치지 않고 사실 그 자체에서 생겨나는 결과적인 필연성을 말한다.
ⓐ 어떠한 필연성도 내가 말하게끔 만들지는 않는다.
(3) 선행하는 필연성이 있는 곳에는 결과적인 필연성이 있지만, 결과적인 필연성이 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선행하는 필연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3) 만약 이 모든 일의 유일한 원인이 예수의 의지라면, 예수가 의지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과 예언이 참인 것은 필연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2) [결과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예수는 사람이 되었고, 그가 한 모든 일을 했고, 그가 당한 모든 고통을 당했으며, 그가 원한 모든 일을 원했다.
(3) 예수의 의지에 선행하는 필연성은 없다.
ⓐ [예수가 겪은] 모든 일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이 모든 일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기 때문이다.
ⓑ 예수가 의지하는 모든 일이 일어나며 그가 의지하는 일만 일어난다.
제18장.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인류의 죄를 위하여 치러졌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했으며 또 고난을 받지 않았어야만 했는가?
<보소의 질문>
예수의 생명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하느님에게 치러졌는가?
<안셀무스의 답변>
예수는 자신에게 가한 불의와 모욕, 십자가에서 죽음을 온유한 인내로써 참아서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예수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죽음을 피했다면 그는 우리에게 이러한 교훈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보소의 반박(1)>
예수가 이러한 본보기를 보여줄 필연성이 없다.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였고 적절한 본보기가 되었다.
<안셀무스의 답변>
예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자신이 치르지 않아도 될 대가를 치른 적이 없으나, 예수는 어떠한 필연성에 의해서도 잃지 않아야 할 생명을 바쳤고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이 치르지 않아도 될 희생을 치렀다.
<보소의 반박(2)>
(1) 예수가 이러한 방식으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보다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하고 더 선한 일을 하는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것이다.
(2) 예수가 더 나은 선택을 알 것이기 때문에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한다.
(3)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하느님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 한 것이 아니다.
<안셀무스의 논증 - 예수는 고난을 받을 권한도 있었고 고난을 받지 않을 권한도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그 일을 해야만 했다.>
1) 하느님은 피조물이 어떠한 일을 하거나 하지 않도록 허락할 때 두 가지 대안을 모두 그의 능력 아래에 두어서 그 중 한 경로가 더 좋아도 둘 중 어느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1) 어떤 사람이 더 좋은 일을 한다면 그는 자신의 것을 기꺼이 바치기 때문에 상을 받을 것이다.
ⓐ 육체적 순결이 결혼보다 낫지만 둘 중 어느 하나를 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 누구나 독신과 결혼 사이에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
ⓒ 하지만 당사자는 둘 중 한 상태를 결정하기 전에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해야 한다.
(2) 피조물은 자신이 아는 가장 좋은 것을 하느님에게 빚지고 그것을 할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항상 맞지 않다.
(3) 그러므로 우리는 한 사람이 더 좋은 일을 해야 한다 하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한다 하거나 그가 해야 하는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2)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필연성”이라는 말은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에 정말로 적용되지만, “~해야 한다”는 말은 [그것이 가리키지 않는] 다른 어떤 것에서 발견될 수 있다.
(1) 가난한 사람은 부자에게서 구호물자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구호물자를 주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 이것은 가난한 사람이 아닌 부자에게 요구된 의무다.
(2) 하느님이 모든 것 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정말로 채권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만물이 하느님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 하느님이 원하는 일을 그가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의지하는 일은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3) 마찬가지로, 피조물이 어떤 것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일을 하기로 의지하든 하지 않기로 의지하든, 그것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은 그것이 의지하는 바가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3) 예수가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의지했을 때, 그는 고난을 받을 권한도 있었고 고난을 받지 않을 권한도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그 일을 해야만 했다.
(1) 그가 뜻한 일은 이루어져야만 하며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의무는 없었다.
제19장. 어떻게 예수의 죽음에서 인간의 구원이 뒤따르는가?
<안셀무스의 논증 – 예수의 죽음에서 인간의 구원이 뒤따르는 것은 필연적이다.>
1) 성부가 성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필연적이다.
(1) 성부가 성자에게 상을 줄 능력이 없다면 성부는 무능하다.
(2) 성부가 성자에게 상을 주려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성부는 불의하다.
(3)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느님과 무관하다.
2) 성자가 받아야 할 상이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성자가 한 일이 헛된 것으로 보인다.
(1) 누군가에게 상을 주는 사람은 상을 받는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주거나 그에게 요구되는 것을 면제해준다.
(2) 성자가 이 일을 하기 전에도 성부에게 속한 모든 것이 성자에게 속했고 성자는 면제를 받아야 할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3) 성자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고 용서받아야 할 것도 없다.
(4) 하느님은 자신에게 바친 것을 반드시 갚아주어야 한다.
3) 성부가 성자에게 주기로 한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은 공정하고 필연적이다.
(1) 성자에게는 자신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권한이 있다.
(2) 성부는 성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오직 다른 누군가에게만 줄 수 있다.
(3) 성자의 죽음에 대한 상을 인간이 받는 것이 마땅하다.
4) 성자의 죽음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준 대상들에게 그 상을 주는 것이 적절하다.
(1) 인간들이 상을 받지 못하면 성자를 모방하는 것이 헛된 것이 된다.
(2) 성자의 부모, 형제들이 무거운 죄 때문에 비참하게 사는데 죄 때문에 빚지는 것이 용서되고 죄 때문에 필요로 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제20장. 하느님의 자비는 크고 의롭다
<안셀무스의 논증>
1) 죄를 저지른 인간이 회복할 수 있도록 성부는 하나뿐인 아들을 주었다.
2) 죄를 저지른 인간이 회복할 수 있도록 성자는 자기 자신을 주었다.
3) 성자의 생명은 인간의 모든 죄를 능가하는 가치를 가지므로, 성자의 생명을 인간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 성부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은 매우 의롭다.
제21장. 악마와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셀무스의 논증 – 인간이 악마와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 [타락한 천사는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다.]
(1) 인간은 하느님-사람인 예수를 통해서만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
ⓐ 예수의 의를 통하여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저질러 잃어버린 것을 다시 얻을 수 있다.
(2) 죄를 저지른 천사들은 하느님-천사인 존재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 하느님-천사의 의를 통해서만 천사가 하느님에게서 빼앗아 갔던 것을 되돌려 줄 수 있다.
2) 천사는 다른 천사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없다.
(1) 천사는 인간처럼 하나의 동일한 혈통에 속할 수 없다.
ⓐ 인류는 한 사람에게서 퍼져 나왔지만, 천사들은 한 조상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2) 인간이 자신과 같은 혈통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인간을 통해 구원받는 것은 옳지 않다.
(3) 천사들이 다른 존재에 의한 상해 없이 자기들이 죄를 저질러 타락했듯이, 다른 존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회복되어야 한다.
(4) 그래서 회복이 불가능하다.
3) 예수를 통한 구원은 천사에게까지 도달할 수 없다.
(1) 천사들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하느님에게 받은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진리에 확고하게 섰을 것이므로, 어떠한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그들이 가지게끔 되어 있었던 존귀함에 다시 도달할 수 없다.
(2) 예수의 죽음의 가치가 인류와 천사의 모든 죄를 다 덮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이치가 타락한 천사들의 회복에 상반된다.
제22장. 구약과 신약의 진리는 이미 이야기해 왔던 것에서 입증되었다.
<보소의 말>
이상의 논의에서 하느님이 필연적으로 인간이 되어야 했음을 증명했다. 이치에 맞는 추론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교도까지 납득시킬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이며 사람인 예수의 새로운 약속의 토대가 된 구약의 진리를 입증했다.
(20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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