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와서 학부 수업을 또 수강하고 있다. 원래 청강하려고 했는데 어찌어찌하여 결국은 수강하게 되었다. 4학년 과목인데 조금 독특한 수업이라 조별과제까지 하게 되었다. 경제학과 학부 수업에서 조별 과제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스물네 살에 학부를 졸업하고 서른네 살에 다시 조별 과제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선생님은 조를 꾸려서 기말 보고서를 쓰고 그 내용을 발표하되 주제는 자유롭게 선정하고 경제학과 관련이 없어도 된다고 하셨다. 로빈슨 크루소 2기 모형에서 시작해서 동태적 일반 균형을 거쳐 경제성장 모형까지 다루는 수업인데, 보고서 주제와 발표 형식을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하자, 조별 과제에 특이점이 오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 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 2기 모형을 자유롭게 그림으로 표현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조원들에게 가능한 위험에 대해 말했다. 발표 전주 수업에서 선생님이 루카스 논문을 제목부터 읽으면서 논문 형식에 대해 꼼꼼히 설명했는데 갑자기 왜 그랬겠느냐, 이건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주제 자유 발표 형식 자유라고 해서 막 나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거다, 라고 나는 학부생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 선생님에게서 <화폐금융론> 수업을 들은 학생이 당시 조별 발표의 경험에 근거하여 나의 위험 감지가 틀린 것 같다고 반박했다. 결국, 원래 계획대로 로빈슨 크루소 2기 모형을 자유롭게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다행히 발표는 무사히 끝났으며 아무런 화도 입지 않았다. 나의 위험 감지는 틀린 것이었다.
학부생들이 그림을 구상할 때 나는 이미 작품을 완성한 상태였다. 학부생들이 나의 잠들어 있던 예술혼을 깨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구상하는 데 5분, 구글에서 그림과 사진을 검색하는 데 5분, 그림과 사진을 그림판으로 합성하는 데 20분, 그렇게 총 30분이 걸렸다. 포토샵을 할 줄 몰라서 그림판으로 합성했다.
작품명은 <이보시오, 내가 로빈슨 크루소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이다. 작품 설명을 보내 달라고 해서 A4용지 2쪽 반에 걸쳐서 작품을 설명했다. 물론 그 작품 설명이라는 것은 토씨 하나까지 전부 개소리인데 굳이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다. 과학철학에서 경제학 방법론에 건전한 비판을 하는 것과 별개로, 시중에서 떠도는 경제학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부당한 개소리다. 경제 모형에는 피가 도는 사람이 안 들어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 당당하게 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진공 상태의 완전 탄성체를 가정하는 물리학자들한테는 짹 소리도 못 하면서 경제학 가지고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얼굴이 심영의 얼굴인 것은, 자기가 경제 모형 속의 행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로빈슨 크루소 2기 모형에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일 수밖에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경제 모형이 실제 세계를 표상한다는 실재론적 견해가 깔려있다. 실재론적 견해를 심영을 통해 표현한 것은, <야인시대>가 방영된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심영은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 고독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학부에서 개소리나 지껄이며 근본 없이 살다가 대학원에 와서 아카데미즘의 불벼락을 맞고 회개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새 사람이 되어 잘 살아보려고 하고 있었다. 아직은 딱히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새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학부생들이 근본 없이 막 살던 과거의 나를 일깨웠다. 정말이지, 잠들어 있던 내 예술혼을 깨우면 안 되는 것이었다.
(20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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