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0

올바른 공부법에 대한 환상



언제부터인가 공부법을 배우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우리의 성취를 좌우하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학습이라고 공부법 전도사들은 말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일화를 언급하는 카드 뉴스도 있다. 1878년 차이코프스키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을 때, 당시로서는 그 곡은 연주하기 너무 어려워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주자인 레오폴드 아우어도 연주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웬만한 젊은 연주자들도 그 곡을 연주할 수 있다며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1878년에 어느 누구도 연주할 수 없었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2018년에는 웬만한 사람이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연주자로서 찬사를 받을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그 곡도 연주할 수 없는 사람은 연주자조차 될 수 없다. 학습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추었지만 연주자가 되는 문턱은 낮추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분야에서 나타난다. 무리수 개념은 피타고라스 학파를 혼란에 빠뜨렸지만, 오늘날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은 무리수와 관련된 수학 문제를 쉽게 푼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학생이 다행히 아직 수학 포기자가 아니라는 것이고 그 뿐이다. 17세기 유럽 최정상급 수학자들은 미적분을 두고 논쟁을 벌였지만,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미분적분학> 수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미적분 문제를 푼다. <미분적분학> 수업에서 A+를 받은 학생은 최고의 수학자가 반열에 오르는가? 아니다. 그냥 조금 똘똘한 이과생일 뿐이다. 오늘날 중학교 수학 교과서를 익힌 사람이 고대 그리스로 간다면 최상위권 수학자가 될 것이고 오늘날 학부 수학 강의를 소화한 사람이 갈릴레오가 활동했던 시대로 간다면 유럽 최고의 수학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경쟁은 항상 당대의 사람과 하는 것이라서 오늘날 사람이 어떠한 일을 옛날 사람보다 잘 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는 오늘날 한국 육군의 대대 병력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발대 1만 2천 명을 부산 해안에서 몰살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말이다.

인간이 어떤 일을 어느 수준까지 할 수 있는가와 그 일을 어느 수준까지 해야 특정 시기에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누군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거나,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일을 대신하고 돈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로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 어느 수준으로 잘 해야 하는지, 그리고 몇 명이나 그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지는 시장에서 결정된다. 어떤 사람이 제 딴에는 잘 한다고 해봐야 같은 시기 같은 시장에서 활동하는 경쟁자들보다 일을 못 해서 일감을 다 빼앗기면 그 사람은 시장에서 퇴출된다. 시장에 남으려면, 같은 일을 남들보다 더 싸게 하거나 같은 값에 남들보다 일을 더 잘해야 한다. 어제 했던 것보다 오늘 더 잘 했다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어제 1등을 했던 사람뿐이다. 김연아는 그래도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된다.

흔히들 말하는 “제대로 된 학습법”이라는 것으로 경쟁력을 갖추려면, 그러한 학습법을 나만 알고 경쟁자들은 몰라야 한다. 그런데 대체로 내가 아는 공부 방법이라는 것은 책으로도 소개되고 방송으로도 소개되어서 개도 알고 소도 안다. 모든 사람이 같은 학습법을 안다면,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학습법이 아니라 재능이다. 그래서 올바른 학습법을 익히고 충분히 훈련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다가 잘 안 되면, 그리고 올바른 학습법이라는 것을 해보고도 잘 안 되면, 미련을 가지지 말고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어떤 일을 해보고 잘 안 되었을 때 적절한 시점에 접으면 심리적인 타격도 적고 큰 손실 없이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 자기가 게을러서 안 되었다거나 노력이 부족해서 안 되었다는 식으로 괜히 자신의 성실성을 문제 삼으면 수렁에 빠지게 된다. 올바른 공부법에 대한 환상은 재능 없는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손실 규모를 키울 뿐이다.

물론 공부법 전도사들이 전혀 무익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당대의 가장 효과적인 학습 방법이 널리 공유되면, 재능이 있지만 환경이 후져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시장에서 선택될 가능성은 커지고, 재능이 없지만 환경이 좋아서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시장에서 선택될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재능 있는 사람은 한정된 자원이라서, 그러한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것은 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직결된다. 공부법 전도사들의 공익적인 역할은 딱 그만큼이다.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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