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집회에 나오지 않을까? 음악 감상하러 집회에 가는 게 아니니까 음악이 촌스러워서 집회에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집단이든 낯선 집단에서는 생소한 단어를 쓰기 마련이니, ‘민중’ 같은 단어가 어색해서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왜 안 나올까? 간단하다. 집회에 가본 적이 없고 주변 사람 중에도 집회에 나가는 사람이 없는데, 평생 안 해본 일을 굳이 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기존의 집회 문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마치 집회 문화가 구려서 사람들이 집회에 안 나오는 것처럼 말한다. 그 말이 맞다면, 기존의 집회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다른 곳에서 따로 집회를 벌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다. 그런데도 그러한 집회는 일어나지 않고 여태껏 대안적인 집회 문화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의 집회 문화가 구리다는 비판은 이미 <딴지일보> 창간할 때부터 나왔는데 말이다.
집회 대부분은 한 사람씩 광장에 나오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이미 조금씩 모인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미군 장갑차 집회나 미국산 소고기 집회처럼 전 사회적인 이목이 집중된 집회도 사람들이 모일 분위기가 조성되고 삼삼오오 같이 나가자는 사람이 있으니까 광장에 모였던 것이다. 그보다 규모가 작은 집회는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은 평소 해보지 않았던 일이나 혼자 하기 부담스러운 일을 할 때 대체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보험에 가입하고 자동차를 사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어 보험을 들 때도 혼자 보험사를 찾아가 상품을 고르는 게 아니라 아는 보험 판매원을 통해 보험에 가입한다. 자동차를 살 때도 믿을 만한 자동차 대리점 하는 지인에게 연락한다. 하다못해 옷을 사러 갈 때도 혼자 가지 않는다. 사람은 개인 차원에서 의사결정을 할 뿐 아니라 집단 차원도 의사결정을 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구입하는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데, 내 일상과 밀접해 보이지 않는 집회에 혼자 각성해서 나간다는 건 비-현실적인 접근이다.
아무리 의식 있고 사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집단에 속하지 않은 개인이 순전히 혼자 힘으로 사회 문제를 파악하고 고민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언론은 시시각각 쏟아지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벅차니, 뉴스와 신문만으로는 사회 문제를 되돌아보는 건 한계가 있다. 하다못해 1년에 몇 번 없는 큰 집회 말고는 어느 집회가 어디서 열리는지 알기도 힘들다.
게다가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하기 쉬운 집회에 혼자 참여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 선진국이든 아니든, 정부를 직접 겨냥하는 집회는 정부가 막기 마련이다. 이런 집회에 조직적인 역량을 발휘하기 힘든 개인은 시시각각 변하는 집회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다. 평화 시위/폭력 시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집회에 물리적인 충돌이 없어야 하겠지만(참고로, 물리적인 충돌은 시위대에게 더 불리하다), 집회 중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게 집회다. 경찰이 시위대를 막을지 안 막을지 알 수 없고, 경찰이 시위대를 막았을 때 시위대가 경찰을 밀고 가려고 할지 그대로 해산할지도 알 수 없다. 민중총궐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게 집회 상황이니 아는 사람 없이 집회에 혼자 참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 시위의 사례로 우버 시위를 제시하기도 한다. 예쁘고 가지런하게 우산 쓴 사람들이 피켓 들고 서 있으니 얼마나 평화롭고 질서 있게 보이겠는가? 그런데 그런 시위를 모범사례로 제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프랑스 택시기사들의 우버 시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똑같이 프랑스에서 하는 우버 시위지만 택시기사들이 하는 집회에서는 도로에 불이 나고 자동차가 뒤집힌다. 먼발치에서 한가하게 하는 시위하는 사람들이야 예쁜 우산 쓰고 조용히 시위할 수 있겠지만, 당장 먹고살 길이 막힐 택시기사들이 그런 한가한 시위를 할 수 있을까? 택시기사들은 택시기사들대로 시위하고, 다른 시민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시위하면 된다. 그런데 평화 시위 같은 소리나 하는 사람들은 시위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시위를 조직하는 것도 아니면서 기존의 시위 문화가 구리다고 궁시렁거리기나 한다. 그런다고 해서 대단히 깨어있는 시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기존의 시위 문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선후관계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시위대의 인적 구성이 바뀌지 않으니 하던 대로 집회를 하는 것뿐인데, 멋쟁이들은 기존의 집회 문화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줄 안다. 집회 문화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할 새로운 집회 문화가 무엇이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새로 유입될 사람들이 있나? 직장인 중에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은 10%도 안 된다. 주변에 있는 자영업자 중에 정당에 가입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살펴보자. 거의 없다. 대학을 다녀도 학생회 선거가 있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학생이 대부분이다. 진짜 문제는 시민들이 부담 없이 참여할 집회 문화가 없다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단체나 조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적인 집회 문화 같은 소리를 하지 전에 대안적인 집단이 있어야 한다. 크든 작든 집단이 생겨야 그 집단들을 중심으로 집회가 가능해지고 집회 문화가 바뀌게 될 것이다. 시위대에 다른 단체가 들어오고 시위대의 인적 구성이 바뀌어야 집회 문화가 바뀌기 때문이다. 집회 문화가 구려서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건 지극히 피상적인 접근이다.
그런데 기존의 집회 문화가 구리다고 비판하는 사람 치고 집단이라는 것 자체에 호의적인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특정 집단을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자체를 불신하며 자유로운 개인들이 아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실제 집회가 왜 일어나며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분석하기보다는 자신이 꿈꾸는 낭만적인 모습대로 집회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집회가 어떻게 해야 실현될 수 있을지를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그런 집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집회는 있다. “북극곰이 죽어가고 있어요”라든지, “우리 고기 좀 덜 먹어요”라고 하는, 누가 봐도 맞는 말을 하고 어느 누구도 반대할 이유가 없는 집회가 그렇다.
내 경험을 덧붙여 보자면, 학부 때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책도 좀 읽고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선배・동기・후배들이 가끔씩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집단이라는 것 자체를 불신하며 개인 차원에서 뭔가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어떤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광장에 모여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했더니 한 목소리를 낸 것도 아닌데 정치가 달라지고 사회가 바뀌며 알 수 없는 법칙에 따라 세상이 조화롭고 아름답게 변한다는 발상은 미신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미신을 믿는 풍조는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 뱀발(1): 외국의 집회 문화와 한국의 집회 문화를 비교하려면 비슷한 집단이 하는 집회를 비교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민주노총의 집회 문화를 구리다는 것을 비판하려면 외국 노동조합은 어떻게 집회하는지를 살펴보아야지 외국 대학생들이 몇 명씩 모여서 하는 집회하고 비교하면 안 된다. 집단 자체를 불신하는 사람들의 눈에 다른 나라의 노동조합 같은 것이 들어올 리 없다.
* 뱀발(2): 집회 문화가 구리고 안 구리고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곳에 모여서 물대포 맞으며 차벽 미는 것은 전략상으로도 적절하지 않다.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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