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연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철학 입문 스터디”를 한다는 광고 글을 보니, 학부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2006년인가 2007년인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학교에서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철학이 필요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돌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본 없이 개구리밥(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사람들도 아니고 나름대로 선・후배 관계도 있으며 학습 같은 것도 할 법한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은 어떤 선배가 나에게 사회 변혁에 왜 철학이 필요한지 물어보았다. 오래전 일이어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나도 그 선배한테 철학이 왜 필요한 것 같냐고 물어보았던 것 같다. 경제학도 아니고 철학이 왜 필요할까? 그러자 그 선배는 그러면 안 된다고, 잘 생각해 보자고 하면서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강신주 박사가 쓴 『철학, 삶을 말하다』라는 책이었다. 선배는 그 책을 읽고 감명을 크게 받았으며 왜 철학이 필요한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책을 펴서 자기가 감동받은 구절을 보여주었는데, 얼핏 봐도 무언가가 이상해 보였다. 그래서 이거 좀 이상해 보인다고 했는데, 선배는 일단 읽어보라며 그 책을 빌려주었다.
다 읽어보았는데도 역시나 감명받을 부분은 없었다. 나는 그 선배에게 “이거 철학이 아닌 것 같다. 철학이라고 해도 도움될 것이 없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철학과에서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수업이 거의 없었고, 나라고 해서 딱히 따로 철학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상식과 감으로 그 책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선배는 어떻게 잘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글을 쓰기로 하고, 빨갱이 자료 비슷한 것을 받았다.
나는 모임의 성격에 맞는 글을 써내고 발표했다. 차마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철학이 필요하다고 믿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느냐?”고 쓸 수 없었다. 절반은 내가 진짜로 생각하는 바였고, 나머지 절반은 내 생각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렇게 비벼 쓴 글을 발표하니, 몇몇 사람들은 철학이 왜 필요한지 알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연구를 못 해서 그렇지, 그런 건 잘 한다.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과는 지금도 가끔 만난다. 20년 가까이 만나온 사람들이다. 그 때 왜 철학 같은 소리를 했는지는 이후에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물어보아도 왜 그랬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학생운동은 점점 망하고 있고, 학생들도 학생운동 같은 데는 관심이 없고, 그런데 고통받고 억울한 사람들은 곳곳에 있고, 학생운동 하는 사람으로서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보자. 정세를 파악한다? 학습을 한다? 될 리가 없다. 나름대로 체계를 갖춘 대학이라고 해도 막 나가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 정도에 근접하지도 못한 조직이 무슨 분석을 하며 무슨 학습을 하겠는가? 조직적 역량을 동원한다고 해보았자 대학생 출신 무자격자들의 자율학습 이상이 될 리가 없다. 결국 접할 수 있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분석과 믿을 수 있는 투쟁사업장 소식 정도였을 것이다.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 중에는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도 없고,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없다고 해보자.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든, 윤 무슨 교수의 세미나를 가든 다 마찬가지인데, 프랑스 철학 전공자라는 사람이 강연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씨부렁 씨부렁 한다면 어떨까?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라는 이름 정도만 기억에 남더라도, 저기에 무언가 쌈빡한 것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충분히 들 만하다. 비록 저 사람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정말로 쓸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저렇게 열심히 자기 인생을 갈아 넣겠는가 싶었을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몇몇 사람들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진지하게 열심히 읽었다고 어떻게 될까? 핵심을 파악했는지, 이해하기나 한 것인지 가려줄 사람도 없다면? 여러 번 읽다 보면, 핵심어는 눈에 익고 입에 붙게 되어있다. 자주 말하면 그냥 단어를 익힌 것에 불과한데도 이해가 늘어난 것처럼 착각할 때도 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읽는 것도 힘들지만, 그렇게 평소 읽던 것과 다른 것(이지만 여전히 빨갱이 내용인 것)을 읽으면 정서적으로 정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복통을 잊으려고 몸의 다른 곳을 찌르다가 통증이 완화되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무언가 고뇌가 완화되는 느낌에 여기에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런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철학이 필요한 것 같다는 오묘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할 것 같지는 않다.
옛날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라고 치고, 사회 변혁에 철학이 왜 필요하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15-20년 전의 내가 아닌 지금의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잘 모르겠으니 믿을 만한 프랑스 철학 전공자를 만날 자리를 주선해 보겠다고 할 것 같다. 그래도 굳이 내 대답을 요구한다면, 나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일 것 같다.
어떤 것을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가늠할 때도 나름대로의 판단 근거가 있기 마련이다. 가령, 김재권 선생님이 자신에게 철학을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는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었다.
[...] 마침내 1958년 6월에 불문학, 수학, 철학을 통합한 과정을 이수한 자로서 다트머스를 졸업하게 되었다. 재학 기간 중에 수학 강좌들을 선택한 주된 이유는 영어로 논문을 쓰는 과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철학 강좌는 다트머스에 온 지 1년 반이 되었을 때 철학과 친구를 따라 진지하게 경청하였는데 그 친구는 다름 아닌 훗날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된 마이로(George Myro)였다. 이 친구는 실존주의 작가들에 대해서 나와 논쟁을 벌일 때마다 내가 주장하는 바를 조목조목 반박하여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다트머스에 와서 첫 학기에 철학 입문 과목을 듣기는 하였지만) 철학을 좀더 배우면 내 논쟁 기술이 다듬어질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철학의 가치를 재고하게 되었다. 이 때가 바로 불문학에 대한 매력을 잃기 시작할 때였다. (15-16쪽)
이런 경우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든지, 머리가 나빠서라고 그렇다고 생각할 텐데, 김재권 선생님은 자기 머리가 충분히 좋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영어 논문을 쓰기 싫은 것이지 영어를 못하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재권 선생님은 자신과 조지 마이로의 유일한 차이를 철학 교육 유무로 보고, 논쟁 기술을 키우는 데 철학이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어떤 일에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일단 성공 사례가 하나 이상 있어야 하고, 해당 사례가 특정 요소를 포함해야 하고, 그 요소가 해당 사례에서 유효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정황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회 변혁에 철학이 왜 필요한가? 성공 사례로 꼽을 것은 무엇이 있나? 이렇게 물어본다면, 대개는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나도 철학이 그 사회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유목민 출신이더라도 원나라는 100년밖에 못 갔는데 청나라는 300년이나 유지된 데는 유교적인 사회 질서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내가 중국사를 잘 몰라서 자신 있게 주장할 수는 없으나, 그 정도 가설을 세우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철학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느냐, 안 미치느냐가 아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세상에 있는 온갖 철학을 다 배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회 문제 중에 어떤 일에 어떤 철학이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로 필요한지를 대략적이라도 보여줄 수 있어야 “실천”적인 첫걸음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문제와 철학을 엮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여줄 수 있나?
며칠 전에 활빈당 당원들과 저녁식사를 먹고 버스 막차 시간을 놓쳐 당수의 집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죽을 끓여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때 했던 이야기 중에는 철학 전공자의 사회적 책무 같은 것도 있었다. 철학 박사 한 명과 철학 박사가 될지 안 될지 불확실한 한 명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했는데,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다. 인문학 전공자랍시고 시류에 휩쓸려 사회에 대한 비-정상적인 책임감을 느끼면 사회와 학계 모두에 해로울 뿐이라는 것이다.
수리철학 전공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적어도 수리철학을 가지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가야사 전공자는 윤석열의 계엄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역시나, 가야사를 가지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오히려 가야사 전공자는 문재인 정권 때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뻔했으니 더더욱 사회적 개억지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마침, 당수는 증거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당수에게 “부정선거 음모론과 관련하여 과학철학자가 증거 개념 운운하면 이미 망한 거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당수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가? 철학자들은 외부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논증하는 사람들이다. 외부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보다 부정선거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게다가 철학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것은 한쪽이 논리적인 만큼 그 반대 입장도 그와 비슷하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것이다. 언론도 아니고 정당도 아니고 철학자가 부정선거 음모론을 반박할 지경이 되었다면 이미 그 사회는 망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비유를 할 수도 있겠다. 북한군이 쳐들어왔다고 치자. 일단은 전방에 있는 부대가 막고, 그 다음 일산에 있는 제9보병사단이 막든지, 평택에 있는 제2함대에서 막든지 하고, 그 다음에 수도방위사령부에서 막든지 하고, 나는 군대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하여간 전방부대부터 막는 순서가 있을 것이다. 부정선거 음모론이 쥐뿔이나 대단한 이론 체계인 것도 아니고, 증거도 아닌 것 가지고 와서 억지 부리는 것이니 사실의 차원에서 논박하면 된다. 언론이든 정당이든 그 정도 수준에서 대응하면 된다. 그렇다면 부정선거 음모론에 철학자가 개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방어선이 다 뚫려서 청와대 경호실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철학은 무력하고 쓸모없다는 것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청와대 경호실로 비유할 수 있다. 적국에서 한 번에 판을 뒤집으려고 대통령 등 주요 인사를 암살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가령,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자들을 선동하려는데, 너무 대놓고 치는 개뻥이라 물적 증거가 너무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해보자. 어떻게 해야 사태를 돌파할 수 있는가? 개념을 바꾸면 된다. 개념만 바꾸면 다른 모든 명백한 사실을 그대로 두고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대안적 사실이 있다며 사실 개념을 바꾸는 것은, 북한에서 청와대로 소규모 특수부대를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 경호실은 그런 상황을 대비하여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것이지 괜히 전방부대에서 가서 깝죽거리면 안 된다. 건강한 사회라면 음모론의 특정 주제가 철학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게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회문제에 (윤리학의 일부 주제를 제외한 나머지) 철학을 뿌리려고 하는 것은 사회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대안적 사실” 같은 소리를 할 때 철학 전공자랍시고 “사실이란 무엇이냐?”라고 하며 음모론자들과 투닥거리고 있으면, 지나가면서 대충 보는 사람들에게는 대안적 사실론자들도 어떤 철학적 기반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 뿐이다. “대안적 사실”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적절한 대응은 “너는 눈이 삐었느냐? 안구에 염좌가 왔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 그렇게 철학 맛을 보여주고 싶어 죽겠으면, 극우 세력에게 중지를 들어 올린 뒤 “나에게 손이 있음을 증명해 보아라”라고 말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다.
* 뱀발
혹시나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니 간단하게 몇 가지를 적어야겠다. 나에게 『철학, 삶을 말하다』를 권했던 그 선배는 그로부터 몇 년 뒤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고, 한때나마 강신주 박사의 팬이었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철학과 학생도 아니었고, 철학과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닌 데다 20대 초반 때 잠시 있었던 일이라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며 타박할 일도 아니다.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고, 대체로 어려서는 더 많이 겪는다. 나는 매일 매일 틀리는 것 같다. 나는 한때 도올 김용옥의 팬이었고, 진중권처럼 사는 것이 꿈이었으며, 내가 박사학위를 받으면 진중권보다 전투력이 강해질 줄 알고 석사과정에 들어갔으며, 김어준의 팬이었으며, 석사과정 때 지도교수님이 나를 박사과정에 안 받아주면 <딴지일보>에 지원해 보아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참고 문헌
김재권 외, 『수반의 형이상학』, 철학과현실사, 1994.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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