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학과 콜로키움에서 철학 전공 선생님의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을 할 때, 어떤 철학전공 박사과정생이 질문했다. 두어 번 질문과 답변이 오갔나? 선생님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약한 주장을 읽고 강하게 해석하는 것이 강한 주장을 읽고 약하게 해석하는 것보다 철학적으로 흥미롭지 않을까요?” 그렇게 추가 질문 없이 해당 질의응답이 끝났다.
나는 연사 선생님이 그 한 마디가 인상적이어서 따로 적어두었다. 여기에는 그 선생님이 최근에 쓴 논문이 <Journal of Philosophy>에 게재되기로 했다는 사실도 일종의 후광으로 작용했겠지만, 그걸 떠나서 보더라도 별 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중요하고 또 간과하기 쉬운 지침이었기 때문이다.
콜로키움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할 때 다른 대학원생들이 그 선생님께 해외 학술지에 투고할 때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았다. 학계에서 더 인정받는 학술지가 있고 덜 인정받는 학술지가 있는데, 어느 정도 수준의 학술지에 투고해야 할지 어떻게 가늠하느냐는 것이 질문의 요지였다. B급 논문을 A급 학술지에 투고하면 게재불가 판정을 받을 것이고 A급 논문을 B급 학술지에 투고하면 게재되기는 하겠으나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힐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논문을 쓰다 보면 감이 온다는 것이다. <Journal of Philosophy>에 게재된 논문을 쓸 때는 ‘이거다’ 하는 감이 왔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자기 논문에 약간 자신이 없을 때는 약간 낮은 학술지에 투고하고, 거기서 게재불가 판정을 받으면 고쳐서 한 단계 높은 학술지에 투고하라는 것이다. 높은 학술지에 투고했다가 게재불가 판정을 받으면 낮은 학술지에 투고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선생님은 반대로 했다. 그에 대해 그 선생님은, 게재불가 판정을 받더라도 심사자의 평을 받을 것이고, 이를 반영하여 논문을 수정하면 더 좋은 논문이 되니 그보다 높은 수준의 저널에 투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훌륭한 선생님들은 그냥 자기가 하던 대로 하기만 하면 알아서 연구가 잘 되니까 자기도 모르게 흘리는 가치 있는 말을 굳이 따로 기록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학계에 남아 있을 수 있을지 중장비 자격증을 따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학계에 남게 되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내외의 훌륭한 선생님들이 가끔씩 흘리는 말을 주워 모아 『나폴레옹 전쟁 금언』처럼 『철학자들의 연구 금언』 같은 책을 쓸 생각이다. 어차피 연구를 잘 하고 못 하고는 태어나기 전에 결정된 것이라서 그런 금언을 조금 안다고 해서 결과가 크게 달라질 리는 없겠지만, 잘 될 예정인 사람들이 잘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이고 안 될 예정인 사람들이 닥쳐올 파국을 알아차리고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철학자들의 연구 금언』 같은 책을 쓰는 것도 나름대로 가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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