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7

고등학교에서 『넛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든 생각



고등학교 독서 동아리 학생들에게 책 내용을 소개하고 토론시키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교재는 탈러와 선스타인의 『넛지』였다. 내가 행동경제학을 잘 모르기는 한데, 아무리 봐도 경제학원론도 모르는 것 같은 어느 경제신문 논설위원이 행동경제학 강의를 하고 돌아다니는 거 보니 고등학교에서 소소하게 독서토론 정도는 해도 될 거 같았다. 하여간 『넛지』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해서 토론 주제를 몇 가지 제시하고 토론했는데, 그 중에는 “기준점 효과와 삶의 질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지 검토해보라(1장)”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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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점 효과는 어떤 것을 추정할 때 자기가 아는 것을 기준으로 추정하고 그에 따라 추정치가 차이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밀워키의 인구를 추정하라고 했을 때 시카고 인구는 약 300만 명이라는 것을 알고 밀워키가 시카고의 3분의 1쯤 된다고 보면 밀워키의 인구를 100만 명으로 추정하고, 그린베이 인구가 10만 명쯤 되고 밀워키는 그린베이보다 세 배 정도 크다고 보면 밀워키의 인구를 30만 명으로 추정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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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점은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데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다음 두 질문이 있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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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1): 당신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 질문(2): 당신은 연인과 데이트를 얼마나 자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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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1), (2) 순서로 제시하면 두 질문의 상관성은 11%로 나오는데 (2), (1) 순서로 제시하면 두 질문의 상관성은 62%로 나온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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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1): 당신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 질문(2): 당신은 모의고사(또는 내신) 몇 등급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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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택시는 기본 요금과 거리별 요금 외에도 기사에게 팁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 때 기사에게 운임의 몇 퍼센트를 팁으로 줄지 택시회사에서 선택지를 제시하기도 하는데, 선택지를 <15%, 20%, 25%>로 제시할 때보다 <20%, 25%, 30%>로 제시할 때 더 많은 팁을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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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와 같은 내용을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한국인들의 행복도와 관련해서 아무 말이나 해보라고 했다. 가령, 한국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불행하다고 느끼니까 기준점을 낮출 넛지를 제공하는 게 좋겠느냐, 아니면 더 열심히 살라고 기준점을 높일 넛지를 제공하는 게 좋겠느냐, 아니면 어느 넛지든 넛지를 제공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으니까 그런 건 하지 말아야 하느냐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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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학생들은 한국인들의 삶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도록 넛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넛지를 제공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약간 더 자극적으로 말했다. “한국 사회가 더 발전하는 대신 빈부격차가 더 벌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망한 사람들한테 어차피 망했으니까 기준점을 높이는 넛지를 제공해야 하나, 더 열심히 살라고 기준점을 높이는 넛지를 제공해야 하나, 아니면 그런 건 넛지가 아니라 조종이니까 아무 것도 하면 안 되나?” 그러자 한 학생이 “어차피 망한 거 마음이라도 편하게 기준점을 낮추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밝혔다. 내가 특정 답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 학생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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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토론시키고 나서 약간 질문을 바꾸어 보았다. “여기는 교육열이 높은 동네고 좋은 동네라고 하는데 그래도 (성적이) 망한 애들은 있을 것이니 일단 이렇게 물어보자.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이 여러분에게 기준점을 설정하는 넛지를 제공할 수 있다. 어차피 내 자식은 성적이 망했으니까 기준점을 낮춰서 만족도라도 높이자고 할 수 있고, 더 족쳐서 되든 안 되든 공부하게 만들자면서 기준점을 높이자고 할 수도 있고, 아무 개입도 안 할 수도 있다. 여러분의 부모들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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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부모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손을 들어 투표하게 했다. 아까 그 학생이 기준점에 영향을 주는 넛지를 제공하면 안 된다는 쪽에 손을 들었다. 내가 그걸 보고 “야, 네가 거기에 손을 들면 안 되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그런 넛지를 제공하는 좀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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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도 안 지났는데 누구의 입장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넛지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는 것을 보고, 과연 공표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넛지가 일종의 조종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막을 수 있는지, 정책 설계자들이 넛지를 사용할 때 그들이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어떻게 담보할지에 의구심이 들었다. 예전에 들었던 수업에 이와 관련 내용이 있기는 있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나서 나중에 관련 연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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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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