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30

2023년 한국과학철학회 학술대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올해 3월이었던가, 6월 말에 해외 저명학자를 초청하기로 일정이 잡혔고 지도교수님은 박사과정 학생들은 거의 의무적으로 그 학자 앞에서 영어로 발표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박사수료생인 데다 학교를 너무 오래 다니고 있어서 이걸 피할 명분이 없었다. 학술대회 발표 신청을 하고 영어 발표를 피하기로 했다.

3월까지는 학술대회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4월에 학술대회 발표 신청을 할 때 초록을 내야 했는데 초록을 낼 상태도 아니었다. 쥐어짜서 몇 줄 써서 냈다. 6월 10일까지는 원고를 보내야 했다. 못 보냈고 결국 초록으로 대체했다.

6월 초에 지도교수님을 포함한 학과 내 전공자 모임에서 발표했다. 원래는 학술대회 때 발표할 것을 미리 보여주었어야 했으나 거의 준비하지 못해서 그나마 발표 가능한 다른 주제로 급조해서 발표했다. 형체가 있는 똥을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형체가 없는 똥을 보여드렸다. 선생님이 물었다. “혹시 이거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것과 관련되는 건가?” 나는 답했다. “아닙니다.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건 이것과 아예 등장 인물부터 다릅니다.” 학술대회까지 시간이 충분히 있으니 발전시킬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도 나는 “이건 이거고 그건 그겁니다”라고 했다.

전공자 모임이 끝나고 저녁식사 할 때, 지도교수님은 대학원생이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학술대회에서 대학원생이 발표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BK21 사업 이후 장학금 관련하여 논문 실적을 요구하게 되면서 대학원생도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게 되었다고 한다. 역시 돈을 이기는 관습은 없는 모양이다. 하여간, 학술대회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이고 책임감을 가지고 발표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 지도교수님 말씀의 요지였다. 이번에는 아예 대학원생 세션도 없애고 일반 세션만 만들었으니까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냥 면피하려고 학술대회 발표신청을 했던 건데. 난감했다.

발표는 6월 말인데 6월 중순까지 원고를 완성하지도 못했다. 도망가고 싶었다. 6월 중순이 지나면서 대충 어떻게 하면 발표는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학술대회를 며칠 앞두고 그제야 어떻게 할지 대충 떠올랐는데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학술대회 당일 오전 7시에 발표용 파워포인트 자료를 완성했다. 도망가지 않고 오후 3시에 발표했다.

6월 초에 발표했던 것은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와 약간 거리가 있는) 설명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번에 발표한 것은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와 관련된 것이었다. 몇 주 전 지도교수님한테 말씀드린 대로 등장 인물과 참고 문헌이 하나도 안 겹치는 아예 다른 내용으로 발표했다. 발표 내용을 세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헨셴: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에 관한 개입주의

(2) 마지아즈와 므로즈: 헨셴을 비판하며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에 관한 다원주의

(3) 나: 마지아즈와 므로즈의 비판에 문제가 있어서 헨셴의 주장에 흠집을 못 낸다

지난 번에 대학원생 세션에서 발표할 때는 형체도 없는 똥을 발표해서 유의미한 논평을 거의 못 들었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형체가 있는 것을 발표해서 유의미한 논평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예전에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의 철학> 수업을 가르쳤던 선생님께서 좋은 논평을 많이 해주셨다.

예전에 대학원 선배하고 학술대회에서 발표에 대한 견해 차이로 말다툼을 할 뻔 했던 적이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 선배: (덕담 비슷하게)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라.”

- 나: “발표하면 좋은데 발표할 게 없다.”

- 선배: “석사논문 썼는데 왜 발표할 게 없냐?”

- 나: “그건 발표할 만한 게 아니다.”

- 선배: “발표를 하고 피드백을 받아야 실력이 는다.”

- 나: “맞는 말인데, 피드백 받을 수준을 가져가야 피드백을 받는다.”

나는 피드백 받을 수준을 가져가야 피드백을 받지, 무작정 “나 이거 했소!” 하고 보여주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안 되고 에너지만 낭비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대학원을 얼마 다니지도 않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내가 받은 피드백과 다른 사람이 받은 피드백을 보니 쉽게 알 수 있었다. 첨삭한 기말보고서를 나에게 돌려줄 때 선생님들의 그 미안한 듯한 표정, 안쓰러운 눈빛, 미안함이 섞인 목소리에서 나는 피드백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내 말이 맞는 것 같다. 문제는 유의미한 피드백을 받을 만한 수준에 어떻게 도달하느냐, 그 문턱을 어떻게 단시간에 넘느냐인 것 같은데, 그건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서 성장에는 재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거침없이 치고 나갈 때 재능 없는 사람들은 뒤에서 뒤치다꺼리나 하게 되는가 보다.

하여간,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발표하면서 학위논문의 방향에 대한 감을 잡는데 약간 도움이 되었다. 갈 길은 한참 남았지만 어쨌든 동쪽으로 가고 있는 것은 맞다는 것 정도는 확인했다.

* 뱀발(1)

다른 사람들이 쓴 박사학위 논문을 보니, 분량은 석사학위 논문 서너 배인데, 그냥 석사학위 논문 서너 개를 붙인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그렇게 분량이 늘어난 것이었다. 잘 나가는 학자들 두 명이 싸우는 판에 어떻게 끼어들어서 뒷다리 잡고 사실은 뒷다리도 못 잡았는데 잡았다고 우긴 다음, 잘못했으니까 한 번만 봐달라고 하면 어쨌든 석사학위 논문은 받을 수 있는데, 박사학위 논문은 아예 그럴 가능성이 차단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핵심이 될 만한 주제와 관련해서 여러 방향에서 찔러보다 보면 뭐가 나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사학위도 경제학의 철학으로 받았고 자연과학 가지고 하면 답도 안 나올 상황이라 박사학위도 경제학의 철학으로 쓴다고 치자. 그러면 그 중에서 제일 강하고 멋져 보이는 걸로 학위논문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사학위만 받으면 그 이후부터 자리 잡을 때까지 연구 가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미미한 주제로 쉽게 쉽게 논문을 써서 실적을 채울 것이니 학위논문 만큼은 강하고 멋져야 사람들이 나를 양아치로 보지 않고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으니까 저러겠지” 하고 이해해줄 여지가 생긴다. 그렇다면 어떤 게 강하고 멋진가? 거시경제학에서는 DSGE 모형이 가장 대표적이고 짱짱 센 모형이라고 알고 있다. 멘큐도 “모든 모형들의 어머니”라고 했다. 철학에서는 짱짱 센 것 중의 대표적인 것이 인과이다. 그러니까 두 개를 붙여서 ‘DSGE 모형을 중심으로 한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를 가지고 학위논문을 쓰면 된다.

그런데 이게 쓰겠다고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경제학의 철학에서 DSGE 모형을 소재로 한 논문과 책이 있는데, 다 제각각 접근 방식이 다르다. 누구는 설명, 누구는 예측, 누구는 실재론, 누구는 법칙, 이런 식으로 다 자기 하던 연구에 맞춰서 논문을 쓰고 책을 썼다. 그걸 보고 나는 어떻게 생각했느냐면, DSGE 모형을 두고 설명, 예측, 이해, 실재론, 법칙 등 어떻게든 계속 찌르다 보면 뭔가 연결되는 게 생길 수도 있고, 그런 게 생기면 학위논문이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게 6월 초에는 설명으로 찔렀다가 견적도 안 나온다는 것을 확인했고, 6월 말에는 개입주의와 인과 다원주의로 찔렀다가 여기는 견적이 나온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6월 초에 지도교수님이 내 발표를 듣고 “(설명에 관한) 두 입장 중 어느 것을 밀고 나갈지 빨리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을 때 나는 “제 입장은 이걸로는 학위 논문을 쓰기 힘들 것 같다는 것입니다. 학술대회 때는 이것과 완전히 다른 걸로 발표하겠습니다”라고 했었는데, 이게 이상한 집착이나 강박이나 고집 때문도 아니고 지도교수에 대한 반항도 아니며, 나름대로 전략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실, 내가 반항하는 아이를 키울 나이지 내가 반항할 나이는 아니기도 하다.

* 뱀발(2)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끝내고 세션장을 나와서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어떤 분이 나를 따라와서는 발표를 잘 들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인사했다. “제가요, 이 분야 사람이 아니라서 선생님 발표 내용을 정말 하나도 못 알아들었는데요, 선생님이 발표하실 때의 그 에너지랄까 그 열정이랄까 잘 모르겠는데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발표 잘 들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감동받았다니. 정말로 내 발표 내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감동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사기는 기세 싸움이란 말인가? 순간, 철학과 인접 분야의 사기꾼 또는 양아치들의 얼굴이 면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들은 기세 좋게 떠들었던 것이다. 역시 사기에서는 기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논증으로 감동을 주어야 철학자이지 기세로 감동을 주면 사기꾼이다. 내 인생이 망하지 않도록 잘 관리해서 논증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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