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9

고등학교에서 하는 소꿉놀이의 의미

     

<시사인> 720호에 실린 “학창시절 배운 미적분과 벡터, 지금의 삶에 유용한가요?”라는 칼럼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산수와 도덕, 읽기 같은 인간 활동에 필요한 능력과 지식은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직사각형의, 책걸상과 칠판이 놓인, 단색의 교실 안에서 개인이 체험할 수 있는 세상에는 한계가 있다. 아침 8시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교실에 앉아 3년을 공부하며 머릿속에 각인된 지식의 대부분은 이제 기억 속에서 휘발되고 없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운영한 교육 동아리의 모의수업, 전교 회장 선거, 학교 오케스트라 공연 같은 체험적인 순간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서 내 정체성을 형성한다. 나는 그런 일련의 사회참여적인 일들을 경험하며 자랐고, 그곳에서 정보를 가공하는 방법과 유용한 정보를 골라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칼럼을 읽고 나는 궁금했다. 정말로 글쓴이가 고등학교에서 “운영한 교육 동아리의 모의수업, 전교 회장 선거, 학교 오케스트라 공연 같은 체험적인 순간들”이 여전히 글쓴이의 “기억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가? 도대체 고등학교에서 얼마나 대단한 체험을 시켜주었길래 그러한 것들이 단순한 일화들이 아니라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자부할 정도인가? 글쓴이가 “정보를 가공하는 방법과 유용한 정보를 골라내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정말로 사교육이나 학교 수업이나 문제풀이가 아니라 글쓴이가 언급한 활동들을 통해서였는가?

 

나는 글쓴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거나 위선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믿음과 그의 진실이 부합하는지 의심하는 것이다. 내 후배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특별한 뜻이 있어서 심리학과에 진학했다고 믿고 있었다. 원래는 그러한 뜻이 있었으나 심리학과에 다니면서 그 뜻을 잃어버렸다고 10년 넘게 믿고 있었다. 나는 후배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결혼을 안 해봐서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현재의 배우자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닐 거 같잖아? 그냥 결혼할 때 만난 사람하고 결혼한 것 같잖아? 그런데 심리학이 뭔지도 모르는 고등학생이 심리학과에 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심리학과에 갔다고? 점수에 맞춰서 간 것이 아니고?” 후배는 눈이 커지더니 “그러네. 심리학과에 갈 이유가 없었네” 하고 말했다. 내 후배는 속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어른도 정직하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글쓴이는 나의 후배와 크게 다른 경우인가?

 

글쓴이도 인정한다. “산수와 도덕, 읽기 같은 인간 활동에 필요한 능력과 지식은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다만 “더 체험적이고 인간적이며 공동체적인 경험들이 교육 현장에서 피어나기 바란다”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미적분과 기하와 벡터를 배울 때 체험적이고 인간적이며 공동체적인 경험들로 배우게 할 것인가? 도대체 한국사 중에서 그런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 것이며, 세계지리는 어떻게 할 것이며, 세계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물리, 생물, 화학, 지구과학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남들은 졸업할 때까지 다 소화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일찍 끝내놓고 여유 있게 사색하고 다른 활동하는 학생들이, 사실은 그 학생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만든 좋은 성적이지만 스스로는 고등학교 때의 다양한 활동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사람 심리상 상수보다 변수에 민감한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똑똑한 것은 고정 요소이고 체험 활동은 변동가능한 것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더 멋있어 보인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명문대 진학보다 고등학교 때의 소소한 추억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두면 된다. 그래도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다. 글쓴이와 같은 시기 같은 학교를 다닌 다른 학생들조차도 글쓴이처럼 생각했을까?

  

인정하기 싫더라도, 어느 행사든 주인공은 정해져 있는 법이다. 학교에서 하는 동아리 활동, 회장 선거, 오케스트라 연주 같은 것을 하면서 그걸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여기게 된 학생은 몇 명이나 있을까? 회장 선거를 한다고 치자. 대부분은 들러리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한다고 치자. 대부분은 들러리다. 체험 활동을 통해서 주인공이 될 학생의 총 수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체험 활동 좀 한다고 그게 그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그리고 냉정하게 말해보자. 만일 글쓴이가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새벽 일찍 택배 상하차 일을 하러 가는 20대 청년이었다면, 그러한 활동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여태껏 믿고 있었을까?

  

중등학교가 몇몇 성적 우수자 위주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대안이라고 들고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 위주로 학교가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에 1등급 학생만 사는 것이 아닌데 다 이야기는 1등급 이내에 든 학생들의 이야기다.

  

성적이 어중간한 학생이라면 학교에서 수업 똑바로 하는 것이 공동체 경험 같은 소리보다 훨씬 시급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의 학력을 갖추게 하느냐가 학교에서 어떤 소꿉놀이를 하게 할 것이냐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미적분과 기하와 벡터를 가르치든 말든 9등급 맞는 학생, 8등급 맞는 학생, 7등급 맞는 학생, 6등급 맞는 학생, 5등급 맞는 학생은 방치되게 되어 있다. 이들에게 소꿉놀이 좀 시켜준다고 삶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게 될까? 그러든 말든 그들의 이야기는 언론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 링크: [시사인] 학창시절 배운 미적분과 벡터, 지금의 삶에 유용한가요?

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947 )

 

 

(202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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