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8

능력주의의 함정?



진보 언론으로 분류되는 매체들에서 능력주의가 대단히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데, 나는 능력주의의 문제라고 불리는 것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진보 언론에서 목소리 좀 내는 사람들은, 마치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내재화해서 차별을 당연시하고 사회적인 연대를 깨뜨리는 것처럼 말한다. 정말 그런가?

내가 능력주의가 뭔지 정확하게 몰라서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정치철학”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진보 언론에서 능력주의의 사례라고 제시하는 사례들은 능력이나 능력주의와 별로 상관없다. 가령, 어떤 고만고만한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고졸자와 대졸자의 차별을 옹호하거나 학교별 차별을 옹호한다고 해보자. 이게 능력주의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학생들은 그렇지 못한 학생들보다 딱히 유의미하게 더 능력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대학을 명문대로 바꾸어도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명문대를 다녀서 능력이 생긴 건지 능력이 있어서 명문대를 다닌 건지 하여간 명문대 출신의 능력자가 그에 걸맞는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문제는 명문대 출신 비-능력자가 명문대 나왔다고 행패 부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능력주의가 아니고 그냥 행패 아닌가? 명문대를 나왔으면 나온 것이지 능력도 없는 주제에 왜 행패를 부리는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사로 제시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노력’이다. 내가 노력을 더 했으니 남보다 대접받아야겠다는 것이다. 언론에 등장하는 능력주의의 사례에서 사람들이 어김없이 노력 같은 소리를 한다. 내가 노력했으니까 내가 더 누리자는데 왜 방해하느냐고 꽥꽥거리는 것을 두고 능력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능력주의인가?

군 가산점 가지고 찡찡거리는 것을 보자. 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에서 능력주의를 옹호한다고 지목하는 사람들과 군 가산점제 부활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외연이 겹칠 것이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군 가산점제와 양립할 수 없다. 군대에서 고생했으면 고생한 만큼 돈으로 받고 끝내야지 가산점을 부여하면 시험 결과가 왜곡된다. 공무원 시험 한두 문제 차이가 공무원으로 일하는 데 얼마나 유의미한 차이를 만드는지는 모르겠으나, 군 가산점을 부여해서 시험 결과가 바뀌면 공무원이 되어야 하는 사람과 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 뒤바뀌게 된다. 이게 무슨 능력주의인가?

그러니까 언론에서 능력주의의 함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쟁에서 밀려날 것 같거나 이미 밀려난 젊은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꽥꽥거리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능력주의라고 하니 앞뒤가 안 맞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처방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개인의 성품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원래 도박장에서 돈을 다 잃으면 행패를 부리게 되어 있다. 도박장에서 돈을 다 잃은 사람이 부리는 행패를 엄격한 규칙의 함정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경쟁에서 밀려날 예정이거나 이미 밀려난 사람들의 꼬장이나 땡깡이나 응석을 능력주의의 함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보 언론에서는 그 동안 수많은 지면과 기자와 필진을 들여 헛다리나 짚고 있었던 셈이다.

도박장에서 돈 잃은 사람들이 행패 부리는 것을 막으려면 몇 가지 조치들이 필요할 것이다. 가령, 밑장 빼는 사람들을 적발할 수 있도록 곳곳에 타짜를 배치한다든지, 물리적 충돌을 막기 위해 건장하고 운동능력 있는 사람들을 경비요원으로 고용한다든지, 돈을 다 잃은 사람에게는 집에 돌아갈 차비와 순대국 사먹을 돈을 준다든지 등등. 이렇게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지, 엄격한 규칙의 함정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면 나아지는 것이 하나라도 있겠는가?

물론, 언론에서 능력주의 같은 소리를 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학교 출신의 능력 있는 사람들이 능력 없는 사람들의 행패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 너무 재수 없어 보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능력 있는 사람들이 사회 문제에 대하여 흐리멍덩한 소리나 늘어놓는 것이 마치 정치적 올바름의 지표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문제의 진단과 처방에 투입될 에너지를 허튼소리 하는 데에 투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21.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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