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6

양아치의 기준



내가 동료 대학원생한테 농담으로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아무래도 교수가 안 될 것 같은데, 교수가 안 되면 양아치라도 되어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동료 대학원생은 그 양아치라는 것이 어떤 것을 가리키느냐, 칼럼니스트를 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칼럼니스트 중에 양아치가 다수 섞여 있는 것 같지만 신문 같은 데에 칼럼을 쓴다고 해서 다 양아치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양아치인가. 동료 대학원생은 이지성 같은 사람이 양아치냐고 물었고, 나는 이지성보다는 강신주 박사 같은 사람이 양아치에 더 가깝다고 답했다.

둘의 의견이 엇갈린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동료 대학원생이 이지성을 양아치의 표본으로 지목한 근거는 이지성의 책이 엉망이며 어느 부분을 펴도 정상적인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양아치의 근거가 안 된다. 양아치는 단순히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아치짓을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양아치짓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무엇이 정상적인 행동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강신주 박사는 자기가 하는 말이나 행동 중에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는지 여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지성은 자기가 정말로 맞는 말을 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이지성은 지적인 심신미약 상태인 것이지 양아치는 아니다.

그런데 양아치의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양아치인지 여부가 단순히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의도와 관련된 것이라면, 양아치와 그냥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것이 폴 크루그먼이 제시한 구분이다.

크루그먼은 『경제학의 향연』이라는 책에서 “경제학자라는 유(genus) 개념에는 대학 교수와 정책 기획자라고 하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두 종(species)이 속한다”(22쪽)고 주장한다. 대학 교수와 정책 기획자라고 하면 둘 다 좋은 사람들인 것 같지만, 크루그먼이 말하는 정책 기획자는 양아치를 가리킨다. 크루그먼은 책을 쓸 당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는 아니었지만 곧 노벨상을 받을 사람답게 현역 교수들을 정책 기획자라고 하며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한다. 크루그먼의 신랄한 비판을 보면 ‘이게 경제학자인가 힙합 뮤지션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돈 자랑이나 하면서 깝죽거리는 한국의 일부 힙합 뮤지션들은 크루그먼의 책을 읽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크루그먼이 말하는 “대학 교수”와 “정책 기획자”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둘 다 경제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고 경제학 교수 직함도 가지고 있어서, 학위 취득 여부나 교수 여부로는 둘을 구분할 수 없다. 당연히 논문 실적 여부로도 둘을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크루그먼이 제시하는 구분 기준은 “출신 경력이 아니라 누구를 대상으로, 무슨 말로 강연하느냐 하는 점”이다.(26쪽) 크루그먼에 따르면, 교수는 대개 다른 교수들을 위해 글을 쓰는 반면 정책 기획가는 오로지 일반 독자만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말을 한다.(26-27쪽)

물론, 누구를 위해 글을 쓰고 말을 하느냐는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고 비판할 수 있겠다. 크루그먼이 이 점을 진지하게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가지 행동상의 차이를 지적하기는 했다.

첫 번째 차이점은 텔레비전에 출연하느냐 여부다. 크루그먼은 “사실상 TV에 나오는 교수는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로버트 루카스나 폴 로머가 일반 현안을 다룬 방송에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하면서 크루그먼은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고 누가 신경 쓰는가? 대학의 경제학자들이 대중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될 게 무엇인가?” 반면, 정책 기획자들은 아침 방송에 나와서 일종의 “경기 예보가들로서 향후 몇 개월 동안 발생하게 될 사태를 자신 있게 공언”하지만 그들의 말은 “거의 언제나 틀린다”고 한다.

두 번째 차이점은 책 제목에 드러난다. 마틴 펠스타인은 대단한 영향력을 미친 논문을 썼지만 논문 제목이 “인플레이션과 법인 이득 과세”(Inflation and Corporate Profits Taxation)인 반면, 주드 외나스키(Jude Wanniski)처럼 저널리스트 출신 정책 기획가라야 책 제목이 『세계의 작동 방식』(The Way the World Works)이라고 붙일 수 있다고 한다. 폴 로머는 경제 성장 문제에 관한 선구적인 논문들을 쓰면서도 “생산성 침체에 대한 무모한 설명”(Crazy Explanations of Productivity Slowdown)과 같이 자기 비하적인 제목을 붙인 반면, 로버트 라이히(Robert Reich)처럼 변호사 출신의 정책 기획가라야 『국가의 과업』(The Work of Nations)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면서 제2의 애덤 스미스로 자처할 수 있다고 한다. 『국가의 과업』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살지 않는데, 아무래도 『The Work of Nations』은 『The Wealth of Nations』(국부론)을 염두에 둔 제목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차이점은 동료들의 평가다. 크루그먼에 따르면, 교수도 정책 기획가의 역할을 맡을 수는 있고 그 보상으로 굉장한 돈과 지명도를 얻을 수 있지만, 교수직에 따르는 모호한 직업 윤리에 크게 제한받기 때문에 (다른 정책 기획가들보다) 불리한 입장이며, 이런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교수들이 몇몇 있지만 최소한 동료들로부터는 교수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한다.(28쪽) 크루그먼이 예로 드는 사례는 갤브레이스다. 다른 교수들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한두 줄 정도 욕하고 넘어가는데 갤브레이스는 여러 쪽에 걸쳐서 비난한다. 나는 갤브레이스 이름 정도만 알기 때문에 갤브레이스가 왜 그렇게까지 욕을 먹어야 하는지 모른다. 하여간 크루그먼은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예를 들어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일반적인 교육 수준의 대중들[...]은 갤브레이스를 중요한 경제 사상가로 생각한다. 그러나 갤브레이스는 하버드의 경제학 교수이기는 하지만, 학계의 동료들은 그를 “매스컴 명사”(media personality) 정도로 여겨서 한 번도 그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없다. 대중들과 교수들의 인식 차이가 특히 크게 벌어진 것은 1967년 갤브레이스가 『새로운 산업 국가』(The New Industrial State)에서 경제학에 관한 그의 사상을 장대하게 전개하였을 때였다. 그는 이 책이 케인즈의 『일반 이론』이나 나아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같은 반열에 올려지기를 바랬다. 이 책에 대해 대중 언론에서는 경쟁적으로 서평을 실었으나, 학계에서는 냉담했다.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갤브레이스의 책은 진정한 경제 이론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연하자면 『새로운 산업 국가』는 무시해도 좋다는 학계의 생각은 옳았다. 역사는 이 책을 상냥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 전부 빗나간 예측이라는 사실을 하나하나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지난 20년 동안 미국 경제에서 거대 기업의 역할은 확대되기는커녕 오히려 축소되었으며 고용 증가는 대부분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자율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경영인들이 주주들을 무시할 수 있기는커녕 주주들에게 고수익을 얼마든지 보장하는 투자자들의 매수 합병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


그러나 중요한 점은 갤브레이스가 틀렸다는 사실이 아니다.(그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의 스승이라는 대중적 평판이 전혀 다치지 않았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중요한 점은 그가 『새로운 산업 국가』를 가지고 심오한 사상가로 자리잡는 데 실패하고 난 후 방향을 바꾸어, 형편없는 내용의 『전환기의 경제학』(Econimics in Perspective, 1987)에서부터 좀 더 읽을 만한 1992년의 소설 『종신직 교수』(A Tenured Professor)에 걸쳐 동료 교수들을 점점 노골적으로 공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28-30쪽)


정책 기획자들은 자신이 교수인 것을 이용하여 일종의 영업을 하며, 다른 교수들의 인정이 장사 밑천인데 다른 교수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다른 교수를 비난하거나 교수라는 직업의 유용성을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써놓으면 신문 같은 데서 이상한 소리나 주워들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신문에 나오는 것 자체가 뻔하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들의 패턴도 뻔하다. 학계가 폐쇄적이라는 둥, 대중과 소통을 해야 한다는 둥, 지식인은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하며 상아탑에만 있으면 안 된다는 둥, 질문하는 사람 딴에는 심각하지만 하나도 예리하지도 않고 유효하지도 않은 질문이나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해 크루그먼 글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능한 답변 중 하나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학자들 다수는 상황이 요청할 때면 명료한 일상 영어를 구사하여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이다.(25쪽) “이해하기 어려운 학자들이 많지만, 간명하고 현실과 밀접한 정책 논점을 잘 만들면서도 학문적 평판도 높은 경제학자들이 결코 부족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그렇다고 하니 일단 그런가보다 하고 믿자. 그러면 왜 학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가? 크루그먼은 “정치인들이 교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의사소통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 권력을 쟁취하고자 할 때, 듣고자 하는 바를 들을 수 없어서”라고 진단한다.(25-26쪽) 아마도 언론은 정치인들이 말하는 대로 받아 적을 것이고 일반인들은 언론에서 떠드는 대로 믿을 것이다.

크루그먼은 “경제학이 원시 과학”이며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의학”과 비슷하다고 말한다.(24쪽) 그 당시 의학자들이 인간의 신체 기관과 작용에 관하여 수많은 정보를 축적했고 이를 토대로 질병 예방법에 대해 유용한 충고를 해줄 수 있었지만 막상 병에 걸리면 대개는 치료할 줄 몰랐던 것처럼, 경제학자들도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의 예방법과 경기 침체의 예방법에 대해 유용한 충고를 들려줄 수 있지만 가난한 나라를 부유한 나라로 만드는 방법이나 경제 성장의 동력이 떨어진 것 같은 때에 성장률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권력을 쥐어야 하고 그러려면 쌈빡한 것이 필요하고 쌈빡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래서 정책 기획자들이 환영받는다는 것이다.

가능한 또 다른 답변은 정책 기획자들이 실제로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은 다음과 같이 갤브레이스를 또 비난한다.


여러 면에서 갤브레이스는 정치와 경제학의 관계에 중요한 새 장을 열었다. 그는 최초의 경제학자 출신 명사(celebrity)였다(여기서 명사란 일반적인 의미, 즉 유명해져서 유명한 인물이라고 정의한다). 정책 기획가로서 갤브레이스의 성공은 미국의 정치 과정에서, 더욱이 공적인 업무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용보다 형식이 더욱 더 중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그러나 갤브레이스의 영향력이 실제 정책 결정에 미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케네디는 그를 행정부로 끌어들였지만, 인도 주재 대사로 발령함으로써 사실상 경제정책에는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케네디 경제 계획의 실질적인 건축가는 철저히 교수들이었다. 사실상 케네디는 휴직 중인 교수들로 구성된 조직인 경제자문위원회(Council of Economic Advisers)의 의장을 각료 수준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대통령이었다.(30쪽)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양아치는 학계에 몸담으면서 학계에 발붙이고 있다는 것을 자원 삼아 장사나 영업을 하면서도 동료 교수를 부당하게 욕하고, 교수직의 사회적 효용 같은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교수들이나 학계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거나 또는 그러한 인정을 받는 것처럼 대중들에게 보이기 원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자면, 철학과 교수인데 신문 칼럼에 5차 산업혁명 같은 소리나 쓰고 강연에서 “철학자들이 하는 말은 유치한 두뇌 게임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학술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는데 학술서적인 것처럼 보이는 책을 출판하는 사람이 해당될 것이다. 이미 정년을 보장받았으므로 그냥 고독한 썰쟁이로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굳이 유사-학술서적을 낸다는 것은 자신이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음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하여 강신주 박사는 학계에 대한 일말의 미련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양아치라고는 볼 수 없다. 아마도 고독한 약장수 정도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내가 동료 대학원생에게 했던 말은 양아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고 했던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아무래도 교수가 안 될 것 같은데, 교수가 안 되면 고독한 약장수라도 되어야겠다”로 정정해야겠다.

* 뱀발(1)

내가 보기에 강신주 박사는 어느 부분이 문제가 되는지를 웬만큼 알고 있는 것 같다. 우선, 강신주 박사는 인터뷰나 강연 등에서 막 나가는 발언을 하지만 단행본으로 나오는 책에는 그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는다.

가령, 예전에 <MBC 시선집중>에서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철학교수만 있고 철학자는 없다는 둥, 대가들은 번역 안 하고 놀고 박사학위 갓 받은 백수들이나 번역을 한다는 둥, 문외한들이 보기에 강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발언을 하지만 책에 그런 내용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강신주 박사가 철학 같은 소리를 해서 그렇지, 사실 『감정수업』은 철학책이 아니라 소설 감상문 모음집이라고 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책이다.

벙커1에서 한 강연에서 강신주는 러셀의 기술이론과 크립키의 인과적 지칭이론을 비교하면서 “러셀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일지 몰라도 철학적으로 보수적이고, 크립키는 정치적으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적으로 진보적이다”라고 했는데, 사실 이는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나온 내용을 거의 그대로 베껴온 것이다.(물론 강연 중에 출처를 전혀 밝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철학 대 철학』에서는 어디서 베껴왔는지 거의 정상적으로 요약을 해놓고는 진보/보수 같은 소리는 거의 하지 않았다.

* 뱀발(2)

크루크먼은 방송에 나오는 경제학자만 욕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자도 욕한다. 도대체 글 한 편에서 몇 명을 욕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1류 경제학자의 스웩인가. 하여간 한국의 일부 힙합 뮤지션들은 크루크먼의 글을 읽고 반성해야 한다.


TV에 자주 나오는 전문가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일반 법칙이 있다. [...] 진정한 전문가라면 연구에 바빠서 TV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 또 TV에 적합한 자질과 뛰어난 연구에 적합한 자질이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경향이 경제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스티븐 호킹은 베스트셀러였던 『시간의 역사』의 저자이자 수많은 경탄할 만한 실화의 주인공이지만 세계적인 일급 물리학자는 아니다.(27쪽)



* 뱀발(3)

나는 크루그먼이 제시한 구분 기준이 양아치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저 정도면 양아치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니 크루그먼이 제시한 기준에 대체로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크루그먼이 글에서 내내 비난했던 갤브레이스는 양아치인가? 나는 갤브레이스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까지만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크루그먼이 제시한 기준 자체는 그럴 듯하니, 아마도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 실제로는 크루그먼이 제시한 기준에 갤브레이스가 부합하지 않는데 갤브레이스를 욕하려고 기준에 꿰맞추었을 가능성 (2) 크루그먼이 제시한 기준에 갤브레이스가 모두 부합하면서도 양아치가 아니라 훌륭한 학자일 가능성 (3) 크루그먼의 말대로 정말 갤브레이스가 정말 양아치일 가능성.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잘 모른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갤브레이스가 정확히 어떤 이론적인 작업을 했으며 어떤 대외 활동을 했는지 찾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설사 갤브레이스에 대한 크루그먼의 비난이 부당한 것이었다고 해도, 한국의 일부 힙합 뮤지션들이 크루그먼의 책을 읽고 반성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참고 문헌

폴 크루그먼, 『경제학의 향연』, 김이수, 오승훈 옮김 (부키, 1997).

(202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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