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에 전 지도교수님께 전화가 왔었다. 선생님께서 DGIST에서 학부 교양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다른 수업에서 조교를 하지 않거나 학위논문 작성 등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수업조교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수업조교 일을 하겠다고 했다. DGIST에서 외부 조교들한테 임금 겸 장학금 비슷하게 주는 것 같은데 하여간 노동량이나 노동강도에 비해 받는 돈이 많아서 나는 만족하고 있다.
나는 현 지도교수님이 전 지도교수님께 인력을 주선한 줄 알았다. 나의 전 지도교수님이 현 지도교수님의 지도교수이기도 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나 혼자 추측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기 초에 있었던 지도교수 면담 때 이번 학기에 아르바이트나 수업조교 같은 것을 하는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전 지도교수님 수업조교를 할 예정이라고 별 생각 없이 답했다. 그런데 지도교수님이 놀라서 나에게 물어보셨다. “뭐? 학부 수업을 하신다고? 어디서?” DGIST에서 하신다고 답하니까 선생님은 또 물어보셨다. “수업 몇 개 하시나? 한 개?”, “두 개 하십니다.”, “두 개? 많이 하시네. 힘드실 텐데...” 나의 추측과는 달리 전 지도교수님은 곧장 나에게 연락하신 것이었다. 하긴, 조교 인력을 구하겠다고 현직 교수에게 문의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다. 나는 전 지도교수님이 공평무사하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한 학기 내내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시험은 온라인으로 진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오프라인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하셨는데 시험 며칠 전까지 시험 감독에 관한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구에 태어나서 한 번 갔나 두 번 갔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15년 전쯤에 어쩌다가 대구 외곽에 갔던 적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이번에는 대구 시내에 들어가겠구나, 이 정도 받으면 기쁜 마음으로 가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렇게 대구에 갈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시험 전날까지도 선생님이 그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시험 감독 관련하여 선생님께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고 선생님이 과제 관련해서 나에게 연락하셨을 때 시험 감독에 대하여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뭐.. 내가 시험 감독하러 갈 예정인데, 한 사람이 가면 되니, 굳이 두 사람이 갈 필요는 없겠네.” 그렇게 해서 선생님이 시험 감독하러 서울에서 대구로 가고 나는 시험 감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서울도 아닌 대구에서 학부교양 강의를 하시나? 거기까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우선, 돈 때문에 하는 것은 거의 확실히 아닐 것이다. 선생님은 잠실에 사시고 아마도 그 집은 전세가 아니라 자가일 것이기 때문에 돈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다. 경력상의 이유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교수 정년퇴임하시고 명예 교수인 분이 학부 교양강의 한다고 무슨 경력이 추가되겠는가? 이렇게 저렇게 빼면 남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어떠한 보람이라든지 하는 것이 남는다. 내가 볼 때는 그것이 최선의 설명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한 10년 쯤 전에 원로 교수들이 학부 교양수업을 하는 이유에 대한 기괴한 발상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이었느냐 하면, 원로 교수들이 학부 교양수업을 하는 이유는 아직 철학에 오염되지 않은 학생들의 “직관을 빨아먹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내가 글을 자극적으로 쓰려고 직관을 빨아먹는다는 표현을 지어낸 것이 아니고, 그 당시에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이 “직관을 빨아먹기 위해서”라는 표현을 썼다. 영화 <동방불패> 같은 데서 흡성대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무슨 놈의 직관을 빨아먹는가 싶었지만 하여간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매우 진지했다.
내가 학부생들 비평문을 가채점하면서 10년 전에 들은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직관을 빨아먹는다는 것이 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내가 학부 다닐 때를 떠올려보면 전 지도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학부생 때의 나보다는 나은 것 같기는 하다. 글도 정상적으로 쓰고, 문장에도 비문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원로 교수가 뽑아먹을 만한 직관이 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원로 교수가 정년퇴임하고 학부생들 수업을 하면, ‘선생님들이 고생하시는 구나’ 하고 생각하든지 ‘교육자는 나이 들어서도 교육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지, 직관을 빨아먹니 마니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천박하게 생각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것 같다.
(202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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