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1

사려 깊은 페미니스트 부모의 역설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의미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의미로 성을 안 쓰거나 부모 성을 함께 쓰는 사람들을 괜히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왜 고깝게 보는가? 별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왜 호적에 올라온 이름을 안 쓰냐는 둥, 식민지를 건설할 때 원주민들의 성을 못 쓰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냐는 둥, 부모 성을 함께 쓰면 성이 2의 제곱으로 늘어나느냐는 둥, 그런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은 죄다 시덥지 않다. 그냥 싫어서 싫어한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 부모가 있다고 가정하자. 페미니스트 부모는 자기 자식이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기를 바라며, 자기 자식이 부모 성을 같이 써도 부당하게 비난받지 않기를 바란다. 분명히 사람들이 왜 호적에 올라온 이름을 안 쓰냐고 시비를 걸 것이므로 아예 호적상 이름에 부모 성을 다 넣기로 한다. 예를 들어, 자식 이름을 ‘남인순’이 아니라 아예 ‘남윤인순’으로 지어서 호적에 올리는 것이다.

자식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자식은 부모 성을 함께 써서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데 사려 깊은 부모가 호적에 부모 성을 함께 올려놓았다. 그렇다고 성이 남윤씨인 것도 아니다. 성은 여전히 남씨이며 이름이 윤인순인 것이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 성을 함께 쓰기 위해 ‘남윤윤인순’이라고 할 것이다.

이제 다시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앞서 말했듯이 부모는 사려 깊은 페미니스트이고 사려 깊기 때문에 자식이 자신의 이름을 ‘남윤윤인순’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호적에 자식 이름을 ‘남윤윤인순’이라고 올려놓는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식이 자기 이름을 남윤윤인순이라고 하면 여전히 아버지의 성만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남윤윤윤인순’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런 식으로 부모의 고민도 깊어지면 이름도 길어지고 이 때문에 자식은 부모 성을 함께 쓰지 못하게 된다. 이를 ‘사려 깊은 페미니스트 부모의 역설’이라고 하자.

부모가 사려 깊은 페미니스트일 경우, 자식의 이름을 정확히 표현하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남(윤)ⁿ인순 (n은 1→∞이고 자연수)


n이 1 이상의 자연수이어야 하는 이유는, n=0이면 ‘남일인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 이름을 이런 식으로 쓰면 안 될 것 같다.

부모 성을 함께 쓸 경우 사려 깊은 페미니스트 부모의 역설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부모 성을 둘 다 쓰는 것보다는 부모 성을 안 쓰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그런데 부모 성을 안 써도 또 사소한 문제가 생긴다. 한국은 성도 몇 개 없지만 비슷한 이름을 쓰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성을 쓰지 않으면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이름 앞에 다른 것으로 수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옛날처럼 호를 짓지도 않을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 대안은 창씨다. 창씨개명을 하면 친일파처럼 보이니까 창씨만 하는데, 남자도 창씨하고 여자도 창씨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 안 쓰기와 부모 성 같이 쓰기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둘의 문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성도 다양해져서 이름도 특색 있는 이름도 많이 생길 것이고, 외국 사람들이 한국 이름을 식별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창씨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이름에서 성을 날리고 가운데 자를 성으로 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평범할 범(凡)’씨 정도로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본관은 지역을 나타내는 게 보통이지만 어차피 알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니면, 영어식 표기를 음차하여 이용할 수도 있다. 최씨는 초이(礎夷)씨로 할 수 있다. 기존 성을 파자해서 새로운 성을 만들 수도 있다. 기존 성과 발음은 같지만 한자는 다른 이름을 만들 수도 있다. 가령, 컴퓨터 쪽 종사자는 전(全)씨를 전(電)씨로 바꿀 수도 있겠다.

(202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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