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7

석사 토토

협동과정에서는 석사학위논문 초고발표회를 하기 전에 초고를 회람한다. 석사학위논문 초고를 훑어보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번 학기에는 몇 명이 석사학위를 받겠다 싶은 느낌은 받는다. 나와 관련도 별로 없는 분야의 석사학위논문을 열심히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 대충 빨리 훑어본다. 목차 보고, 초록 보고, 서론 보고, 결론 보고, 본론에서 몇 부분만 살짝 봐도 그 정도 판단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거의 대충은 맞는다.

나와 전공이 같은 대학원생들은 대체로 다른 전공의 초고를 거의 안 읽는다.(물론, 다른 전공 대학원생들도 과학철학 석사학위논문 초고를 안 읽는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밥 먹다가 동료 대학원생들이 그래도 초고를 대충이라도 훑어본 나에게 이번 학기 초고는 어떻더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몇 승 몇 패’라고 답한다. 승은 통과된다는 것이고 패는 탈락한다는 것이다. 가끔 ‘몇 승 몇 무 몇 패’라고 답하는데 여기서 ‘무’는 남은 두 달 동안의 작업에 따라서, 또는 교수와 학생의 타협에 따라서 졸업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통과되고 떨어질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좀 그래서 승률로 답변을 대신하는 것이다.

내가 초고발표회의 승률을 논하다가 ‘이거 토토로 만들어도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차피 박사과정 지원 과정에서부터 베팅을 하게 되는데, 초고를 두고 베팅을 하는 것은 왜 안 되겠는가?

대체로 학부나 석사 졸업 예정자의 졸업 여부가 실질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6월(1학기)과 12월(2학기)인데, 대학원 입학 지원서는 4월(1학기)과 10월(2학기)에 제출하게 되어 있다. 졸업 여부가 결정되기 두 달 전에 대학원 지원서를 넣는 셈이다. 이러한 행정 절차에 대한 대학원들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박사과정 입학 지원서를 받기 전에 아예 석사학위논문 심사를 끝내버리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박사과정 입학 지원서를 받기 전인 4월과 10월에 석사학위논문 초고발표회를 하고 6월과 12월에 석사학위논문 최종 심사를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박사과정에 지원하면서 자기가 석사학위를 받을지에 대하여 일종의 베팅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석사 토토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법적・윤리적 이유보다도 더 결정적인 이유는, 내기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내가 초고를 두고 승률을 이야기한 이후로 동료 대학원생 중에서도 다른 전공의 초고를 훑어보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들도 나와 거의 비슷한 판단을 한다. 가령, 내가 “이번 학기는 4승 2패네요”라고 하면 초고를 대충 훑어본 다른 동료 대학원생이 “아, 그 2패가 아무개와 아무개인가요?”라고 물어본다. 그러면 나는 “2패라고만 했지 누구라고는 안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맞다. 의견이 엇갈려야 내기가 성립하는데 의견이 거의 수렴되니 내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내기가 성립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과학철학 전공에는 통과하지 못할 초고는 초고발표회에 나가지 않게 하는 관례 비슷한 것이 있어서 승률을 판단할 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승률은 전적으로 다른 전공에 달린 것인데, 당연히 다른 전공의 대학원생들이 자기 전공을 훨씬 잘 알 것이므로, 석사 토토를 만들면 항상 과학철학 대학원생이 불리하게 된다. 나에게 항상 불리하게끔 되어있는 내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석사 토토가 가능하다면 아마도 철학과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철학과에서는 석사학위논문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심사장에 못 가게 하는 것이 관례이다. 3월과 9월에 철학과 사무실 앞에는 발표예정자 명단이 붙는데, 일주일마다 명단이 갱신되며 명단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최종 발표자들은 대부분 석사논문심사를 통과한다. 이 때 최종 발표자가 몇 명이나 남을지를 두고 토토를 만든다면, 내기다운 내기가 가능할 것이다. 철학과는 세부 전공이 다양한 데다 초고발표회를 따로 하지 않아 논문 심사를 앞두고 사전 정보를 얻기 어려우니 베팅하는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이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 뱀발

6월과 12월에 최종 심사를 하는 것은 아마도 4학기 졸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10월에 최종 심사를 통과하기는 어려운데 12월에는 최종 심사를 통과할 논문을 쓸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철학과 방식이면 5학기에 졸업하고 협동과정 방식이면 4학기에 졸업한다. 내가 보기에 4학기에 졸업하나 5학기에 졸업하나 그게 그거 같은데, 하여간 많은 대학원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들었다. 4학기나 5학기나 그게 그거라고 빗장이 풀리면 5학기나 6학기나 그게 그거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할까봐 아예 그럴 여지를 차단하려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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