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1

내가 학계를 버릴지언정 학계가 나를 버리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올 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학문적 재능이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고민을 한다고 한다. 나는 남들이 하는 두 가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학문적 재능이 있는지 고민하는 것은 그런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안 서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 그딴 게 있을 리 없다고 확신해서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지식소매 시장의 동향을 살펴보니, 수요에 비하여 공급은 부족하고 주로 유통되는 것은 죄다 저질 상품이고 고품질 상품을 생산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장 진입 의사가 없었다. 교수가 안 되더라도 서비스업으로 먹고 살 수 있다고 보아서 먹고 사는 문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씩 불안할 때가 있다. 나는 학문적인 성과를 남길 수 있을까. 한때는 근본 없이 굴러다닐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근본 있는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학문적 성과 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고 다닌다고 하자. 고객들이야 내 이야기를 듣고 재미있어 하겠지만 근본 있는 다른 연구자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학술대회 같은 데 가서 참가비나 내고 들러리로 남들 발표하는 거나 듣고 밥 먹고 돌아오면서 내일은 고객들한테 어떤 재미난 이야기나 할까 고민한다면, 그때의 나는 자괴감 같은 것이 들까 안 들까.
  
나는 이런 이야기를 과학사 전공자에게 했다. “[...] 과학사 쪽은 모르겠는데 적어도 한국에서 과학철학이나 분석철학 하는 사람 중에서 나만큼 일반인한테 뻥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없는 것 같다. 그게 내가 박사과정 오는 동력이 되기도 했는데, 그래도 남들만큼은 연구해야 하는 거 아니냐. 먹고 사는 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시덥지 않은 소리나 하고 살면 별로 아름답지 않잖아.” 그런데 과학사 전공자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아닐걸? 과학사 통틀어도 형이 뻥을 제일 잘 칠걸?”
  
그 말을 들으니 모처럼만에 기분이 유쾌해졌다. 내가 한참을 소리 내서 웃으니 과학사 전공자가 신기한 듯 보다가 같이 웃기 시작했다. 둘이 한참을 웃고 나서 과학사 전공자가 물었다. “아니, 형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좋아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욕으로 한 말도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칭찬인 거지. 조조는 난세의 간웅이 된다는 말을 듣고도 웃었다는데.”
  
내가 학계를 버릴지언정 학계가 나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데, 그러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한다. 어쨌거나 공부가 제일 문제다.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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