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2

작은 결함이 보여주는 것



사소해 보이는 작은 부분이 어떤 것의 많은 부분이나 중요한 부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며칠 전, 책 읽는 법에 관한 자기계발서를 훑어본 적이 있다. 대대장님 정신 교육처럼 공허하고 따분한 헛소리로만 채워놓은 상당수의 자기계발서와 달리, 그 책의 저자는 사람들에게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책은 그런 좋은 의도와 별개로, 책 읽기에 도움이 될 만한지 의심스러운 책이었다. 책에서 아무데나 짚어도 석연치 않은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변한다는 사실뿐이다”라고 했다. 30대만 되어도 머리가 나빠져서 공부가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말자. 뇌과학이 증명하듯이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변한다.’ (16쪽)


뇌 가소성을 설명하기 위해 헤라클레이토스가 나올 필요가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이 뇌 과학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도 아니고 뇌 과학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단지 뇌가 변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맥락과 무관하게 헤라클레이토스의 멋있는 말만 따온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씩 들고 다니는 ‘뇌’를 중심으로 독서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독서라는 판도라 상자를 최신 뇌과학, 심리학, 행동경제학이라는 재료로 떠받치고, 스토리와 인문학이라는 날개를 달아 독자의 품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21쪽)


뇌를 굳이 “우리 모두가 하나씩 들고 다니는” 것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썼다면 모르겠지만, 책에서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독서를 “판도라 상자”로 비유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독서가 어떠한 행위인지 분석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괜히 열어서 낭패를 본 경우와 연결할 수 없다. 판도라의 상자 대신, 그동안 감춰진 비밀을 드러낸다는 다른 표현을 찾아서 사용했어야 했다.

몇 쪽 읽지 않았는데 이런 문장이나 표현이 튀어나오면 책을 살 생각이 사라진다. 작가라는 사람이 왜 글을 그 정도밖에 못 쓰는지, 저자가 다른 사람에게 책 읽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인지, 그런 내용이 책에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더 확실한 사례는 <아트앤스터디>의 진중권 강연에서 볼 수 있다. 진중권은 영화 <디워>를 비판하면서 미적 정보량을 언급했다. 예술작품의 미적 정보량은 엔트로피와 네그 엔트로피와 관련된다. 시나리오가 너무 복잡하면 파악이 안 되고 플롯이 너무 단순하면 재미가 없다. 진중권은 이와 관련지어서 대중문화는 질서도가 강하고 아방가르드 같은 것은 복잡성이 강한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 활동을 무질서 상태에서 질서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엔트로피는 미적 정보가 높은 것이고 네그 엔트로피는 의미 정보가 높은 것이다. 진중권은 서예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예를 들 수 있냐 하면, 서예를 할 때 정자체를 쓰게 되죠. 그러면 의미 정보가 큰 겁니다. 금방 알아볼 수 있죠. 그런데 여러분, 해서라는 거 보셨어요? 거의 글자체를 못 알아보겠죠? 그건 미적 정보가 큰 겁니다. 예술적으로는 뭐가 더 아름다워요? 해서는 예술입니다. 그런데 정서는 뭐예요? 예술은 아니라는 거죠. 다른 것을 지향한다는 거죠. 스칼라가 다 있습니다. 서예의 서체들도 엔트로피와 네그 엔트로피의 관계가 다 달라요.”


다 틀린 내용이다. 우리가 아는 반듯반듯한 글자체는 해서이고, 정서는 해서의 다른 이름이다. 해서를 약간 흘려 쓴 것이 행서이고 그보다 많이 흘려 쓴 것이 초서이다. 진중권은 해서를 정서라고 맞게 불렀지만 초서를 해서라고 불렀다. 진중권은 서예 서체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진중권은 서예 필체를 해서와 초서를 가지고 엔트로피와 네그 엔트로피의 예를 들었는데 이는 적절한 예가 아니다. 못 알아보는 사람들 눈에는 초서가 아방가르드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초서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해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만큼 초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예술적인 목적 때문에 못 알아보게 쓴 것이 아니다. 진중권은 해서가 예술이 아니라 다른 목적(정보 전달)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 또한 틀린 말이다. 그렇다면 한호(한석봉)의 글씨나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에 걸린 이광사의 글씨는 무엇인가.

진중권이 서예를 언급한 것은 30초밖에 안 되지만 이것만으로도 진중권이 서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진중권은 서양 미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서예를 좀 모른다고 하여 전공자로서의 능력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사례들이 시사하는 바는, 눈에 보이는 작은 결함은 잘 안 보이는 더 큰 결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작은 결함을 고치려면 그것과 관련된 큰 결함을 고쳐야 한다. 흔히들 큰 결함을 고치는 데는 큰 노력이 들고, 작은 결함을 고치는 데는 작은 노력이 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작은 결함이라는 것이 큰 결함을 고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큰 노력을 들여도 실력이 쉽게 늘지 않고 사소한 개선에 머무르는 것은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자질구레한 것까지 다 신경 쓰라는 말이 아니라 큰 결함이 없을 때만 작은 결함까지 잡아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 링크: [아트앤스터디] 진중권의 디워 비판

( www.youtube.com/watch?v=_MxNLfc2Myo )

* 뱀발

이건희가 쓴 『Samsung Rising』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고 한다. 내가 그 책을 직접 읽은 것은 아니고 다른 책에 있는 것을 옮겨온 것이다.


일반 제트기는 마하 0.9 정도로 음속보다 약간 느린 아음속인 것으로 안다. 전투기처럼 음속 2배의 초음속으로 날려면 엔진의 힘이 2배만 있으면 될 것으로 아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비행기 재료공학, 기초물리, 화학 등 모든 원리와 소재가 바뀌어야 초음속 제트기가 될 수 있다. 마하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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