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08

할머니와 봄볕



할머니가 집 안에서 넘어진 건 올해 2월 말이었다.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간 건 아니었는데 할머니는 계속 아프다고 하셨다. 예전에 할머니가 몸져누울 때마다 용봉탕을 드시고 자리에서 일어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한다고 용봉탕을 해드렸는데 할머니는 용봉탕을 드시고 급체를 한 뒤 급속도로 쇠약해지셨다. 친척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이 드셨는데 할머니만 체하셨다. 기력이 쇠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기름진 것을 먹이면 안 되는데 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하려다가 오히려 더 쇠약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한 달 정도 자리에 누워계셨다.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더니 나중에는 혼자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게 되었다. 점점 말씀도 못 하게 되셨다. 점점 말씀하는 것이 어눌해지더니 나중에는 단어 하나 발음하기도 힘들어졌다. 할머니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고개와 왼쪽 팔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왼손잡이여서 맨 마지막까지 움직일 수 있는 팔이 왼쪽 팔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자리에 누웠다는 소식이 퍼지자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왔다.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정신을 거의 온전히 유지하셨다.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알아보셨다. 동네 사람이 할머니 앞에서 “저 누구인지 알아보시겠어요?”라고 하면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다. 동네 사람이 일부러 틀린 이름을 말하면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고 맞는 이름을 말하면 그 때 다시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할머니는 왼팔을 들어 나를 가리킨 뒤 손가락으로 본인의 입을 톡톡 치셨다. 내가 “마실 것 드리라는 거죠?”라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다.

나는 주중에 학교 다니느라 서울에 있었고 주말에 집에 왔다. 주말에 집에 와서 어머니께 할머니 소식을 들었다. 주중에는 상태가 안 좋아져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는데 주말이 되니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주중에 말씀을 못 하시면서도 그렇게 나를 찾았다고 하셨다. 그 때가 돌아가시기 2주 전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화천이는 새끼를 낳았고 이 소식을 어머니가 할머니께 전하자 할머니가 그렇게 기뻐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말씀을 못 하시고 왼손을 쫙 펴서 어머니한테 다섯 손가락을 보였고 어머니는 화천이가 새끼를 일곱 마리 낳았다고 했다고 한다. 평소에 화천이가 새끼를 낳으면 다섯 마리씩 낳아서 할머니는 이번에도 화천이가 다섯 마리 낳았냐고 물어보신 것이다.

나는 할머니께 날씨가 좋으니 낮에 따뜻할 때 현관에 나가서 봄볕이라도 쬐자고, 고양이 새끼가 너무 어려서 새끼는 못 보더라도 화천이랑 눈 노란 놈, 눈 파란 놈 보자고 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일어나 앉아 있기도 힘들어하셨고 점심 때 죽 몇 숟가락 드시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식사하시고는 본인을 눕히라고 손짓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두꺼운 요에 눕힌 다음 요를 살살 끌어서 현관문까지 모셔가려고 했는데 결국 하지 못했다.

화천이 새끼들은 이제 눈도 뜨고 삐약삐약 울면서 현관문 앞을 뛰어다닌다. 올해 봄에도 예년 봄처럼 화천이는 새끼를 낳았고 날씨는 화창하고 마당에는 잔디가 파랗다. 작년 봄이었다면 할머니는 현관문 앞에 앉아서 나물 같은 것을 다듬었을 것이고 붙임성 좋은 눈 노란 놈은 할머니 곁에 앉아서 할머니한테 장난을 치든 할머니 품에 안기든 했을 것이다. 이제 할머니는 안 계시다. 할머니께 그럴듯한 손주 며느리를 데려오지 못한 것이나 그럴법한 직장에 못 다닌 것보다 봄볕을 쬐도록 하지 못한 것이 더 마음에 남는다.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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