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04

인문학과 자아 성찰



유명 입시 강사들이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방송에서 하다가 물의를 빚자, 이와 관련하여 MBC뉴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인문학의 본질은 질문을 통한 자아 성찰이라는 겁니다. [...] 두꺼운 책 말고도 영화, 드라마, 음악 같은 모든 콘텐츠 형식으로도 인문학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에 대한 긴 호흡의 학문인 인문학이 요즘엔 아쉽게도 스펙 쌓기 용의 토익이나 토플처럼 지나치게 가벼워지고 있다는 점입니다.”(MBC 뉴스, 2016년 7월 4일)


인문학의 본질이 자아 성찰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언어철학에서 명제 태도를 연구하는 것은 자아 성찰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과학철학에서 모형이 실제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연구하는 것은 자아 성찰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수의 본성을 묻는 수리철학은 자아 성찰에 어떤 도움을 줄까? 19세기 조선-청 외교 관계를 연구하는 동양사 전공자는 어떤 자아 성찰을 할까? 경제사 전공자는 통계 자료를 붙들고 어떤 자아 성찰을 할까?

인문학의 본질이 자아 성찰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생각인 것 같다. 그런데 어떤 학자가 그런 말을 했는지, 했다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따져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자아 성찰이 중요하다면서 정작 그것과 관련된 지식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다.

기자들 중에 인문대 출신들도 꽤 있을 텐데 지상파 뉴스에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기자들이 학부 때 잘못 배운 것이 뉴스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내가 유학동양학부에서 전공 수업 들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교수와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마치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들처럼 이상한 소리를 해서 깜짝 놀란 적이 가끔씩 있었다. 어떤 학부생들이 “모든 학문은 결국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라고 말해서, 나는 ‘아니, 저게 무슨 격물치지 성의정심 하는 소리야?’ 하고 의아해했는데, 다른 학생들도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해서 더 놀랐던 적이 있다.

어쩌면 인문학과 자아 성찰을 동일시하는 것은 성리학의 잔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아 성찰 같은 소리 하는 사람 중에 몇 명이나 동양철학에 대해 웬만큼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의문이다.

* 링크: [MBC] 요점정리식 ‘인문학 강의’ 성행에 득실 논란

( http://imnews.imbc.com/replay/2016/nwdesk/article/4017968_19842.html )

(201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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